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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끝난 뒤

[푸린] 감질클럽 소오름 돋는 릴.레.이.소.설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8. 11. 13.


(푸린)




1.

고개를 들어보니 사방이 암흑이었다.

은수는 손을 들어 팔뚝 주변을 서둘러 비볐다. 아무리 주변의 온기를 끌어 모으려고 해도 추위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축 흘러내리는 배낭을 고쳐 멘 은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걷고 또 걸었다. 하루 종일 바삐 움직였던 다리는 애처롭게 휴식을 달라며 울부짖는 듯 욱신거렸다.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다. 평소의 은수라면 아무런 목적 없이 거금을 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은수는 망설임 없이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가장 빠른 거 아무거나 주세요.”

평소 같았으면 손을 덜덜 떨었을 그 큰돈을 은수는 거침없이 건넸다. 은수는 공항에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며 웃음 짓는 여행객들, 제 몸짓보다 큰 캐리어를 옮기며 선량한 미소를 띤 승무원들, 청소할 거리를 찾아 한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청소원들... 그러다 은수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은수는 이내 도망치듯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10년 간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고향에 도착했다. 충동적이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기억과 똑같은 고향의 모습에 은수는 한 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어릴 적 집. 은수는 끼익 소리를 내며 우는 마룻바닥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뽀얀 먼지가 손에 묻어나왔다. 집을 훑어보던 은수의 눈에 어둠 속 새하얀 무언가가 들어왔다.

 

한 통의 편지였다.

 




(고래)

2. 10년 전 그날도 하얀색 편지봉투가 있었다. 은수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엄마는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날 밤 난데없이 용달 트럭이 오더니 은수와 엄마를 태웠다. 엄마는 마을을 빠져나갈 때까지 은수의 입을 꽉 막고 안았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엄마는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은수의 양팔을 붙잡고 말했다.

 

은수야, 저 집에서의 기억들은 전부 잊어야 돼.”

 

엄마에게는 벌써 저 집이 되어버렸다. 엄마의 차가운 단언에 은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는 자신의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 금세 서울에 직장을 얻었다. 은수 역시 그날 이후, 고향을 잊으려 노력했다.

 



(우진)

3.

돌이켜 생각하면 엄마의 말은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 집에서 은수가 엄마와 함께한 기억은 드물었다. 은수가 더 어렸을 때의 기억은 희미했다. 은수는 주로 혼자였고, 드물게 학교 친구들을 불러들이곤 했다. 외로움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엄마가 말한 저 집에서의 기억이란, 엄마는 엄마대로 은수는 은수대로 각자의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엄마는 은수의 외로움을 알았던 것일까. 왜 마치 모두 알았던 것처럼 이야기했을까. 은수는 알 수 없었다. 급하게 떠나온 서울에서도 모녀의 관계는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엄마는 치열했고, 은수는 겉돌았다. 둘은 그렇게 과거를 청산할 틈도 없이 서둘러 떠났다. 아니, 도망쳤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편지는 깨끗했다. 두고 간 지 며칠 되지 않아보였다. 마치 누가 은수의 우연한 방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벨이 울린 건, 은수는 편지를 막 집어든 때였다. 은수는 편지를 등 뒤로 숨기고 현관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수가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현관을 반쯤 열어버린 그림자가 말했다.

 

은수야?”

 

낯익은 목소리. 정작 얼굴은 기억하기 어려웠다. 은수는 찡그린 눈으로 과거의 얼굴들을 빠르게 떠올리려 애썼다.

 

은수 맞지? 나야. 널 기다렸어.”

 


 

(마브)

4.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 연우였다. 은수 엄마가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은수는 연우네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곤 했었다. 엄마들끼리도 가까워서 서로의 집 사정을 꽤 잘 알았다. 연우는 아직 이 동네에 살고 있다고 했다. 연우는 집에 가는 길에 은수네 집을 항상 지나치는 데 오늘 불이 켜져 있어서 바로 들어왔다고 했다. 은수는 연우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본인의 집 이야기를 들었다.

 

10년 전 은수의 아빠는 집을 떠났다. 은수와 엄마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그 전에도 외지로 돈 벌러 간다고 집을 오래 비웠던 아빠가 아예 집을 떠나버린 것이다. 은수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자신이 어떤 면에서 서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던 아빠가 엄마와 은수를 다시 찾는다고 한다. 오래 전 아빠는 시골에 허허벌판이었던 작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자리가 재개발 지역에 선정된 것이다. 아빠는 둘을 찾으러 원래 살던 집에 찾아왔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치듯 떠난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빠는 수소문 하다가 연우네한테 도움을 부탁했다. 10년 만에 찾은 집에서 발견한 편지도 아빠가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희조)

5.

은수 엄마

편지는 그렇게 시작했다.

혹시 고향에 와보지 않을까 싶어 남겨. 당신이 고생한 걸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날 도와줘. 그동안 나 당신이 내린 벌 다 받았잖아. 빚쟁이들한테 쫓길까봐 뿔뿔히 흩어졌어도 대신 옥살이한 건 나였어. 이제는 나도 새 삶을 살고 싶어.“

 

봉투에는 편지말고도 한 장의 종이가 더 들어있었다. 이혼 서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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