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감질클럽 회원여러분. 날씨가 많이 추워졌네요. 오늘은 제가 책을 읽으면서 밑줄 친 곳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작년 12월에 이 블로그에 쓴 '[고래]책 속에 밑줄 긋기_국가란 무엇인가'에서도 말했지만, 제가 밑줄을 치는 기준은 모호합니다. 특히, 방송을 위해 읽는 책은 인상깊은 것 뿐만아니라 여러분들께 소개하고 싶은 것까지 표시하는 편이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때와 달라진 점을 굳이 찾자면, 요즘엔 밑줄뿐만아니라 제 생각도 메모다는 점입니다. 생각이 든 그 페이지에 쓰거나, 맨 앞 혹은 뒤에 간지를 이용해서 씁니다. 제 생각을 직접 써놔서 그런지 책이랑 더 정이 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인들에게 책을 빌려줄때 약간 민망하긴합니다.
오늘은 제가 스토너에 표시해놓은 부분을 타이핑해봤습니다. 블로그 글을 읽고 방송을 들어보시면 더 재밌으실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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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 스토너 책의 첫머리입니다. 스토너라는 인물의 삶을 짧게 요약한 후,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보통은 주인공을 특별한 인물로 부각시키기 마련인데, 인물을 지극히 평범한 인물로 묘사해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죽음 후엔 스토너뿐만 아니라 누구나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란 생각이 들어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읽은 몇 백쪽짜리 소설 속 스토너는 그리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학문에 대한 열정, 가정에서의 고뇌 등 자신의 특별한 삶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타인에게는 그저 열문장 정도면 그의 생은 충분히 설명되는 것이죠. 이 점은 스토너뿐만이 아닐테죠.
P38
하지만 윌리엄 스토너 앞에 놓인 장래는 밝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래를 수많은 사건과 변화와 가능성의 흐름이라기보다 탐험가인 자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장래는 곧 웅장한 대학 도서관이었다. 언젠가 도서관에 새로운 건물들이 증축될 수도 있고,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낡은 책들이 치워질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불변이었다. 그는 몸을 바치기로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곳에서 자신의 장래를 보았다.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체가 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 도서관은 스토너의 삶을 대표하는 장소입니다. 도서관에서 그의 문학적 꿈을 키웠고, 세상을 배웠습니다. 표지 일러스트를 보면, 얼굴 반 정도가 책이 쌓여있는 걸로 보이는데 스토너를 상징적으로 잘 나타낸 것 같습니다.
P45
"자네도 도망칠 길은 없어, 친구. 없고말고. 자네가 누군가? 소박한 땅의 아들? 자네가 행세하는 것처럼? 아니, 아니지. 자네도 환자일세. 자네는 몽상가이고 광인이야. 세상은 더 미쳤지만. 산초가 없는 우리만의 돈키호테. 푸른 하늘 밑에서 뛰놀고 있지. 자네는 꽤 똑똑해. 어쨌든 우리 둘의 친구인 저 녀석보다는 똑똑하니까. 하지만 자네에게는 오점이 있네. 오래된 약점. 자네는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여기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곧 알 수 있을 걸세. 자네 역시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다는 걸. 자네가 세상과 싸울 거라는 얘기가 아냐. 세상이 자네를 잘근잘근 씹어서 뱉어내도 자네는 아무것도 못할 걸세. 그냥 멍하니 누워 무엇이 잘못된 건지 생각하겠지. 자네는 항상 세상에게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니까. 목화밭의 바구미, 콩줄기 속의 벌레, 옥수수 속의 좀벌레. 자네는 그런 것들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싸우지도 못해. 너무 약하면서 동시에 너무 강하니까. 이 세상에 자네가 갈 수 있는 자리는 없네."
P54.
그가 느리게 말했다.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는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으면 안 되네. 인류가 겪은 전쟁과 패배와 승리 중에는 군대와 상관없는 것도 있어. 그런 것들은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할 때 이점을 명심하게."
=> 친구 매스터스는 난놈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P78.
그녀는 자신이 남편과 가족을 위해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며, 그 의무를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고 배웠다.
=> 방송에서 많이 말한 부분입니다. 이디스는 가족에 대한 의무수행을 교육(강요)받고 자랐습니다. 자라면서 세뇌당한 것들은 한 인간을 평생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이디스의 어머니 또한 '역할'에 대한 교육을 받아왔을 것이고, 그 윗세대도 계속 그래왔을 겁니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진 모르나, 이들은 이게 자신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어느새 잊은 것 같습니다.
P128.
"잘 모르겠지만, 아까 예배 중에 나는 계속 데이브 매스터스를 생각했네. 프랑스에서 죽은 데이브와 자기 책상에 앉아 죽은 채 이틀을 보낸 슬론. 두 사람의 죽음이 같은 종류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나는 슬론하고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아마 좋은 사람이었겠지. 적어도 내가 듣기로는 그렇다고 했네. 그런데 이제는 새로운 교수를 물색하고, 새로운 학과장도 찾아봐야 해. 모든 게 그냥 이런 식으로 계속 돌고 도는 것만 같아. 도대체 이것이 다 뭔가 하는 생각이 드네."
"맞아." 윌리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그든 핀치에게 커다란 호감을 느꼈다.
P142.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가 책꽂이를 만들기 위해 낡은 판자들을 사포로 문지르자 표면의 거친 느낌이 사라졌다. 낡은 회색 표면이 조각조각 떨어져나가면서 나무 본래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더니, 마침내 풍요롭고 순수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떤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P251.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것 같았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P274.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느 ㄴ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람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P279.
그것이 그해 여름에 두 사람이 배운, 이른바 '기존 관념'의 기이한 점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 두 사람은 마음과 몸이 별개의 것이며 서로 적대적인 관계라고 배우며 자랐다. 그래서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나머지 하나를 희생하는 수밖에 없다고 당연한 듯이 믿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화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진실을 깨닫기도 전에 체험이 먼저 찾아왔으므로, 이 새로운 발견이 오로지 두 사람만의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이처럼 '기존 관념'이 기이하게 달라진 사례들을 모아 보물처럼 간직해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기존 관념을 고수하는 세상으로부터 두 사람을 분리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두 사람이 야단스럽지는 않지만 감동을 느끼면서 서로에게 더 가까워지는 데에도 일조했다.
P302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두 사람이 사는 세상의 하늘이었던 나지막하고 어둑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만약 내가 모든 걸 던져버린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떠나기로 한다면...... 당신은 나랑 함께 가주겠지, 그렇지 않소?"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겠지, 그렇지 않소?"
"네, 알아요."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스토너는 자신에게 설명하듯이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 우리가 했떤 모든 일과 우리의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오. 내가 교단에 설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고, 단신은...... 당신도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겠지. 우리 둘 다 지금과는 다른 사람, 우리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사람이 될 거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거야."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번 일에서, 적어도 우리 자신의 모습은 지킬 수 있었소. 지금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니까."
"그래요." 캐서린이 말했다.
"장기적으로 내다봤을 때, 날 이 자리에 붙들어둔 것은 이디스도 아니고 심지어 그레이스도 아니오. 반드시 그레이스를 잃을 것이라는 사실도 아니지. 당신이나 내가 상처를 입을 것이라는 생각이나 추문 때문도 아니오. 우리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라는 사실 때문도 아니고, 어쩌면 사랑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도 아니오. 그저 우리 자신이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 우리의 일이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
"알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도 세상의 일부인 거요. 그걸 알았어야 하는 건데.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 뒤로 물러나서 그렇지 않은척할 수밖에 없었던 거요. 그래야 우리가......."
"알아요." 캐서린이 말했다. "저도 아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도 알고 있었어요. 언젠가, 언젠가, 우리가 ......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에 갑자기 눈물이 글썽해지면서 반짝였다. "그래도 그까짓 게 다 뭐예요, 빌! 그까지 것!"
P304.
스토너는 조용히 일어나서 어둠 속에서 옷을 입고 그녀를 깨우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그리고 동쪽에서 회색 빛이 처음 밝아올 때까지 컬럼비아의 적막한 거리를 걷다가 캠퍼스로 향했다. 그는 제시 홀 앞의 돌계단에 앉아 동쪽에서 떠오른 빛이 안뜰 한복판의 커다란 돌기둥을 기어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 낡은 건물을 안에서부터 망가뜨린 화재가 생각났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들을 보고 있자니 아련한 슬픔이 밀려왔다. 사방이 환해졌을 때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연구실로 가서 첫 번째 강의시간을 기다렸다.
P311.
과거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는 대학이라는 기관에 구현되어 있는 신중한 믿음에 다시 의지해싿. 속으로는 그 믿음이라는 것이 별것 아니라고 되뇌었지만, 이제 자신이 손에 쥔 것이 그것뿐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P350.
"제 생각에......." 그녀가 말했다. "제 생각에 저는 일부러 임신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걸 몰랐지만요. 제가 여기서 도망치는 걸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저한테 필요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던 것 같아요. 원하지 않은 임신을 피할 정도의 지식은 있었으니까요, 정말이지. 고등학교 때의 그 많은 남자애들, 그리고......." 그레이스는 아버지를 향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랑 엄마는 모르고 계셧죠?"
"그랬던 것 같구나." 그가 말했다.
"엄마는 제가 인기 있는 아이가 되길 바라셨어요. 뭐...... 제가 인기가 있기는 했죠. 하지만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어요. 전혀."
"네가 불행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스토너가 힘겹게 말했다. "하지만 난 정말 몰랐어...... 정말로......"
"저도 몰랐던 것 같아요. 알 수가 없었죠. 에드가 안됐어요. 결국 이용만 당한 셈이니까요. 제가 그 사람을 이용했어요. 아, 물론 그 사람이 아이 아버지인 건 맞아요. 그래도 제가 그 사람을 이용한 거예요. 착한 사람이라서 항상 그 일을 부끄러워했죠....... 스스로 참질 못했어요. 그래서 원래 입영날짜보다 6개월 먼저 입대해버린 거예요. 그저 도망치고 싶어서. 제가 그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될 거예요.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우린 서로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두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스토너는 그레이스가 직접 말했던 것처럼 절망을 거의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레이스는 해가 갈수록 술을 조금씩 더 마셔서 공허해진 자신의 삶에 맞서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조용히 살아갈 터였다. 그는 그녀에게 적어도 그런 생활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 이디스 역시 자신이 교육받았듯이, 딸 그레이스에게 '좋은'역할에 대해 강요합니다.
P353.
이제 자신은 예순 살이 다 되었으므로 그런 열정이나 사랑의 힘을 초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함, 초연함 밑에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렬하고 꾸준하게. 옛날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 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던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느 ㄴ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P387.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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