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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끝난 뒤

[고래] 투명음료를 아시나요?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8. 12. 9.

안녕하세요. 고래입니다. 43화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 방송 재밌게 들으셨나요?
오늘은 몇 개월 전에 쓴 편의점 관련 글을 한 편 공개하려고 합니다. 그때 받은 제시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편의점에 들어갔다.'를 첫 문장으로 사용한 글을 작성하시오.]
저는 이 제시문을 가지고, 일본 여행중 편의점에서 본 투명음료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방송에서도 잠깐 언급을 했었죠.
그럼, 글 재밌게 읽어주세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역시 편의점의 고장이라 불리는 일본이다. 한국 편의점도 많이 따라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할게 못 됐다. 여행까지 와서 편의점 음식을 찾는 취업준비생의 처지가 안타까웠지만 막상 들어오니 신이 났다. 수십 가지의 도시락과 오니기리는 물론이고 매장 구석에 화장실까지 있었다. 무엇을 살까 고민하며 행복하게 눈을 굴려댔다. 내 눈이 멈춘 곳은 음료 코너였다. 냉장고에 든 음료들이 죄다 투명했다. 투명한 콜라. 투명한 커피. 투명한 녹차.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냉장고 속에 투명한 것들이 질서정연하게 서서 나를 바라봤다.

보기만 해도 청량감이 느껴지던 검정색 콜라. 크림이 섞여 부드러운 갈색을 띠던 커피. 색깔만 봐도 알 수 있었던 연녹색 녹차. 이 녀석들 어쩌다가 이렇게 투명인간이 된 걸까. 냉장고 앞에 서서 뉴스를 찾아봤다. 최근 일본에서는 색상 음료의 매출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회사 내에서 색상 음료를 먹으면 상사나 동료의 눈치가 보인단 이유였다. 그래서 나온 게 ‘물’인 척 하며 마실 수 있는 투명음료였다. 음료조차 눈치 보며 먹어야 하는 사회. 음료 먹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투명음료를 몰래 마시는 게 편한 사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음료들은 자신들의 색을 버려야만 했다.

“팔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자네.” 콜라 녀석이 말을 거는 거 같았다. 팔리기 위해 투명해져야 하다니. 어딘가 취업준비생인 나의 처지와 닮은 듯 했다. 자기소개서 팁을 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내용이 있다. ‘자신을 회사에 판매한다는 생각으로 써라!’ 나는 최대한 사고 싶은 상품이 되어야 한다. 먼저 토익점수가 필요하다. 한국사나 한국어 자격증 역시 없으면 찝찝하다. 공모전, 인턴경험도 기본이다. 여기에 엄청난 역경을,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끈기 있게,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극적으로 해결한 경험!(헥헥, 숨이 찬다.) 역시 필요하다. 결국 진실이든 거짓이든 모든 것을 채우고 나면 나는 투명해져있다. 주위를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나도 내 옆 사람도 무색무취의 인간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 팔리기 위해서 콜라, 커피, 녹차 그리고 나는 투명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편의점을 가득 채울 정도로 투명한 음료가 성행하는데, 그것을 직장 동료나 상사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본인들도 다 마실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실은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책상에 놓인 투명한 것들의 정체는 물이 아니라 콜라, 커피, 녹차다. 그러나 본질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눈에 거슬리지 않는 투명한 색이면 통과되는 것이다. 그러니 콜라도 나도 투명해지려고 열과 성을 다 할 수밖에 없다.

냉장고를 바라봤다. 질서정연하게 서있는 투명음료들이 구분이 안 갔다. 팔리기 위해 투명해진 음료들이 팔리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서로 집어달라고 사정하는 거 같았다. 모든 음료가 무색이 되면 다음은 향이 똑같아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 다음은 맛이 똑같아질 거다. 그런 편의점은 끔찍하다. 일부러 허리를 잔뜩 숙여 진한 색 음료를 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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