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희조입니다.
저번 '문학을 읽는다는 것'을 읽은 이후 문학을 읽을 때 소설이 인물을 대하는 태도에 집중해서 읽게 됐어요. 이번 글에서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서술 방식에서 제가 인상깊었던 부분을 짚어볼까 합니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과 비교하면서요.
첫째로 이 소설의 특징은 제목에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제목 어떻게 보십니까? (아무 생각 없으신가요?) 이반 일리치는 (물론 한국어 이름은 아니라 생소하지만) 특별한 공인이나 명사의 이름이 아니라 ‘어느 누군가’ ‘누구라도 좋은’ 평범한 일반인의 죽음을 나타냅니다. ‘어느 한 남자의 죽음’이라고 했어도 좋았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반 일리치’라는 진짜 있을 법한 사람의 이름을 빌려오는 것이 더 감정이입하기 쉽겠죠. 즉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평범한 일반인의 이야기인 척 하면서 우리 주변 많은 사람의 이야기임을 드러내는 방식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도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소설들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소설이 주인공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82년생 김지영> 모두 굉장히 건조하고 무심한 문체를 취하고 있습니다. 둘 다 주인공의 생각과 감정을 전지적 작가 시점을 활용해 가감없이 표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1인칭 주인공 시점마냥 주인공의 감정에 놀아나진 않습니다. 대신, 주인공들의 생각과 감정이 그다지 대단치 않은 양 오히려 조금 거리감을 두면서 묘사하여 전지적 작가 시점이지만 사실 주인공을 관찰하는 소설 속의 또 다른 인격체가 있는 양 읽히기도 합니다. 이런 쓸데없이 자세하지만 공감을 구걸하지는 않는 서술 방식은 왜 쓰인 걸까요?
두 책을 읽으면서 저는 헷갈렸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경우 ‘이반이 조금 속물적으로 살긴 했지만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잖아?’ ‘가만 보면 그때는 다 그렇게 사는 것 같은데 뭘’ 하고 이반 일리치를 감싸게 됩니다.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김지영이 억울해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회사도 꼭 여자라고 차별한 것은 아니지 않아?’ ‘단지 억울한 일만 모아놓다보니 김지영의 삶이 불행해보이는 것 아니야?’ 하고 김지영의 마음에 선뜻 공감이 가질 않습니다. (제 경우는 그랬습니다. 김지영에 바로 자신을 동일시하고 공감하는 독자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헌데 이렇게 독자가 어리둥절해하거나 큰 주제가 뭔지 파악하기 어려워하는 그때, 두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슬며시 드러납니다. ‘이반 일리치와 그 주변 사람들이 그러했듯, 우리는 이미 그런 물질적 욕망과 속물적 사고방식에 이미 너무나 포섭되어 있지’ ‘김지영이 살고 있는 사회가 그러했듯, 우리는 이미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 너무나 익숙해 구조 밖에서 사유할 수 없는 거야’ 와 같이 말이죠.
보통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들 중 잘 쓰인 소설은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생각하는 것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같은 편인 척 하다가 또 멀리 달아나고 독자를 우롱하는 것 같다가 또 손을 내미는 미꾸라지 같은 서술 방식이 이 힘을 극대화시켜주죠. 제게는 위 두 소설이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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