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질클럽 여러분 안녕하세요^^ 26번째 모임에서는 이문구 작가의 <관촌수필>을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누어보았습니다.
2부에서 시간 관계상 짧게 다루었지만 감질클럽 멤버들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관촌수필>의 시대적 배경인 1900년대 초중반의 사회 격변기를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들어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관촌수필” 코너였는데요.
제가 작년 가을에 외할머니댁에 가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때 할머니가 그 시기를 어떻게 살아내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서 과거의 일을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 놀라워서 동영상을 찍어두기도 했지요.
그리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 시기에 대해 알려진 역사를 찾아보다보니 더 신기했습니다.
깨알 같은 에피소드들이 많지만 안타깝게도 할머니께서 공개하는 걸 꺼려하셔서 모든 내용을 다 말씀드릴 순 없지만 간략하게 소개해드리면서 부역자, 보도연맹에 대해서도 알아본 내용들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제 외할머니께서는 1933년생, 1남 4녀 중 둘째 딸이며 어린 시절을 통영 근처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보내셨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서울과 충청도 등지에서 온 피난민들이 할머니가 살던 동네로 왔다고 합니다.
피난민들도 집에서 먹을 것을 싸 짊어지고 왔지만 다 떨어지면 할머니 집에서 된장, 고추장 등을 얻어다 먹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내 꺼, 네 꺼도 없는 상황이었고 피난민들이랑 소도 잡아먹고 돼지도 잡아먹고 다 나눠 먹었다고 합니다.
(사진 출처: http://photo.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6/15/2016061502900.html?Dep0=twitter)
여름이라서 피난민 일부는 할머니 집에서 자고 방에 못 들어간 사람은 옷을 “따시게” 입고 밖에서 잤다고 합니다. 원래 조용한 동네였는데 피난민들이 내려와서 떠들썩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민군들도 내려와서 동네 면장, 경찰, 지주들을 잡아다가 죽였다고 합니다.
또한 동네에 윙 소리나고 펑 터지는 소리가 들리자 할머니 집안의 여자들은 옷과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서 다른 친척집으로 피난을 갔다고 합니다.
피난을 갔다가 추석은 다시 원래 살던 집에 돌아와서 보냈다고 합니다.
1950년의 추석은 9월 말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대다수의 피난민들은 다시 고향으로 많이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전세가 바뀌어서 인민군을 잡는다고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보도연맹이라는 단어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1950년 6.25일 이후부터 9월 서울 수복 전까지 군과 경찰에 의해 수만 명 이상 보도연맹원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국가에서 조직한 관변단체였습니다. 국민보도연맹 창설 당시 정부는 급증하는 전향자들을 정부가 관리하는 단체에 소속시켜 이들의 사상을 개조하고 관리하기 위해 보도연맹을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보도연맹은 전향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이들을 통해 남아있는 좌익세력을 붕괴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창설 초기 보도연맹 가입자는 전향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직 확대과정에서 정부는 보도연맹 의무가입대상을 광범위하게 규정하였고, 이 규정은 자의적이어서 좌익과 관련이 없는 국민들이 가입되었습니다. 또한 가입인원이 말단 행정기관에 할당되었는데,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지역에서 좌익에게 물자나 식량을 제공한 혐의로 강제로 가입된 경우가 있었고, 주민 간의 사적감정에 따라 보복으로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 일부지역에서는 비료나 배급 등 각종 혜택을 준다고 유인해 가입시키거나 심지어 본인도 모르게 가입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보도연맹원이 북한에 점령된 지역에서 협조할 것을 우려하여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11월 27일, 울산지역 보도연맹 사건을 '1950년 8월, 군인과 경찰에 의해 울산지역 보도연맹원등 예비검속자 407명이 10여차례에 걸쳐 경상남도 울산군 온양면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와 청량면 삼정리 반정고개에서 집단 총살된 사건'으로 진실규명을 결정한 바 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정부가 인정한 것입니다.
문헌을 찾아보니 할머니가 살던 동네 근처에서도 7-8월 경에 보도연맹원 학살이 이루어졌는데 할머니가 피난을 간 사이에 학살이 이루어져서 여기에 대한 기억은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기억대로 1950년 9월 서울 수복 이후부터는 전세가 바뀌어서 부역자 처벌이 이루어졌습니다.
전쟁 발발 후 인민군 점령 지역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수복 후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습니다. 정부의 거짓선전에 속아 서울에 남았던 잔류시민과 패잔병을 부역자로 가혹하게 처벌하였습니다.
서울과 주변지역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국군에 의해 부역혐의자에 대한 총살이 자행되었는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가평, 강화, 고양, 여주, 남양주, 포천, 가평 등 여러 지역에서 그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은 서울과 경인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 광범위한 지역에서 자행되었습니다. 1950년 8월 20일 경남 통영에서 수복과 함께 부역혐의로 총살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부역혐의자에 대한 최초의 살해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이후 경남과 경북을 거쳐서 경기도, 충청남북도 등에서 수복 직후 부역혐의자에 대한 총살 사건이 발생했으며, 치안이 안정된 1950년 10월 초순부터 1.4후퇴 직전까지도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 사건이 전국에서 계속 발생했습니다. 경기도가 재수복된 뒤 1951년 4월경까지 경기도 여주와 충북 음성 등에서 부역혐의자에 대한 총살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임의총살사건을 일으킨 경찰과 치안대 등에 대한 처벌은 매우 관대했으며, 특히 경찰관에 대한 처벌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부역자 처벌은 합수부의 전횡뿐만 아니라 군인과 경찰, 우익 청년단 등에 의한 사형(私刑)이 만연하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익 청년단을 비롯한 민간 사설 단체가 개인적 원한 관계에 따라 보복과 살상 행위를 자행했으며, 군인과 경찰관은 부역 혐의자의 재산과 부인을 빼앗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부역자에 대한 공식적인 심사와 처벌은 계엄사령부가 맡았지만, 기관이 현저히 부족해 사설 단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심사와 처벌이 개인적인 감정이나 응징, 경쟁자를 처벌하는 데 이용됨으로써 파벌과 갈등을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부역자 심사 작업이 한국 화단(畵壇)의 파벌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증언은 그 하나의 본보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해도 각 분야의 갈등의 이면에 잠복해 있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결국 이 시기 부역자 처리를 둘러싸고 배태된 갈등은 한국 사회 전반에서 갈등과 파벌 구조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한국전쟁의 비극성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다가 이전에는 잘 몰랐던 보도연맹원 학살사건과 부역자 처벌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감질클럽 청취자분들도 기회가 된다면 조부모님이나 부모님, 그 외 주변 어른들께서 역사적인 사건이 있을 때 어떻게 사셨는지 여쭤보면 어떨까요?
그럼 다음에 또 찾아올게요^^
감사합니다!
<참고사이트>
보도연맹 학살사건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05
부역자 처벌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8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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