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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끝난 뒤

[냉정한 이타주의자] 못다한 성자랑 톡톡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7. 6. 24.



안녕하세요 푸린입니다~




이번 냉정한 이타주의자에서는 본인이 선행을 했던 경험과 이타주의에 대한 멤버들의 생각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아쉽게도 성자랑 톡톡을 시간 관계상 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성자랑 톡톡은 각 책톡 멤버들이 선행을 했던 사람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려 했었는데요.

그럼 못다한 성자랑 톡톡! 이제 시작합니다



<푸린>


박열




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 붉은 피로써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인류에 의해 더럽혀진 세계를 깨끗이 씻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죽어갈 것이다. 거기에 참된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고, 평화가 있다.

참으로 선량하고 아름다운 허무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박열의 선언


박열선생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중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18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흑도회, 흑우회 등 항일 사상단체를 이끌어 온 그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의 와중에 일본국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인해 그는 1945년 10월 27일 아키다()감옥에서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이라는긴 시간의옥살이를 치러야 했다. 해방 후 맥아더 정부에 의해 석방된 선생은 신조선건설동맹에 이어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단장을 맡았으며,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고 말았다. 북한에서 그는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해 회장을 맡아 군대축소와 국제적 중립국화에 노력하였다. 1974년 1월 17일 서거하여 현재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하지만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에 끼친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남북한 양쪽을 비롯해 고향에서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미소 냉전체제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아나키즘 사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지만, 밑바탕에는 일제의 '천왕체제'는 물론 남북한 정권의 철권통치 모두를 거부하고자 했던 그의 자유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희조>


이한열 






훗날 6월 항쟁으로 불리게 된 1987년 여름, 연세대학교에서 이뤄진 반독재 시위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의해 한 대학생이 쓰러진다. 

그는 27일간 세브란스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다 7월 5일 세상과 이별한다. 그는 바로 당시 경영학과 2학년이던 이한열이다. 

이한열이 사망함으로써 6월 항쟁은 더욱 격렬한 반독재투쟁이 됐고, 결국 전두환 정권의 직선제 수용을 이끌어 냈다. 

그는 죽었지만, 그는 주변인들의 인생을 바꾸고 죽었다. 

그의 어머니 배은심 씨는 이후 민주유가족협의회 일원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에 힘썼고,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연대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이한열의 벗겨진 운동화를 주워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다 준 이정희 씨는 이후 YMCA에서 20년 동안 시민운동에 힘쓰고 있다. 

이한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은 1987년 8월 이한열 열사 추모사업회를 만들었고, 이는 지금의 이한열기념사업회의 전신이 되었다. 

이한열기념사업회는 이한열장학회를 만들어 매 학기 10명 내외의 학생들에게 150만 원의 장학금을 주고 있다.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매년, 매일 많은 사람들이 힘쓰고 있다.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중백>


조너스 소크




평생을 바쳐 소아마비의 백신을 완성한 사람. 

그리고 그 백신을 통해 얻을 수 있던 모든 이익을 포기하고 인류의 건강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인류의 위인.

미국 의학연구자와 바이러스학자로, 소아마비 백신을 처음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연구와 헌신으로 현재 WHO를 통해 보급되는 소아마비 백신의 공급 단가는 단돈 100원에 불과하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소아마비 환자는 백신 출시 이전의 1% 이하 수준으로 감소했다. 

분에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소아마비의 공포에서 사실상 벗어났다.

우선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자면 소아마비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문제였다. 

특히 미국에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는데 소크 백신이 개발되고 배포된 1955년 이전에는 매년 소아마비에 걸리는 아이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특히나 1952년은 미국 역사상 전염병이 가장 심각하게 발생한 해로, 수많은 어린이들이 이 질병으로 고통받았는데, 

한해에 58,000건의 소아마비가 보고 되었고, 3,145명이 사망하였고 21,269명이 마비가 되었다. 

2009년 PBS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당시 분위기는 "원자폭탄을 제외하고도, 미국은 소아마비에 떨고 있다." 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그 결과, 과학자들은 소아마비를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미칠 지경이었다. 

1948년, 조너선 소크는 소아마비 국립재단으로 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연구에 몰두했고 7년간 소아마비 백신 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피츠버그 연구실에서 개발을 진행하던 그는 백신개발에 성공하게 되었고 1953년 11월에 최초 임상시험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후 1954년, 20,000명의 의사와 공중 보건 관계자, 64,000명의 학교 직원들과 220,000명의 자원봉사자들, 1,800,000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임상테스트를 시행했다. 

그리고 1955년 4월 12일, 소아마비 백신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마브>


어머니




저희 어머니를 자랑하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공부방 선생님을 오랫동안 하고 계십니다.

저와 제 동생도 학창시절에 학원에 다니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공부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 둘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나서는 지역복지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아직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자식들에게 하듯 최선을 다하십니다

원래 수업 시간보다 시간을 연장해서 수업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결석을 하거나 

진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친구들에게는 다른 날에 보충수업을 해주십니다

그리고 공부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성에 맞추어 진로를 정하는 것에도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십니다

자식을 키워본 경험을 통해 학생, 부모님과 별도로 오랜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 한 단계 한 단계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함께 고민하십니다.

학생들이 성적이 오르거나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행복해하십니다

이처럼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직업인으로서의 모델이 되어 주십니다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일을 통해 작은 연대를 실천하시는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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