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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끝난 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뒤풀이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7. 2. 12.

안녕하세요 중년백수 입니다.

책이랑 톡톡 59화에서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상의 회고록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2부에서는 하루키상에게 살짝 숟가락을 얹어서 저희 책톡 멤버들이 각자 'ooo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주제로 글을 써와서 읽고 감상을 나눴습니다. 저는 '독서', 희조씨는 '요가', 고래씨는 '게으름'에 관한 글을 각자 써왔었습니다. 저는 원래 6단계 정도로 독서에 대해서 쓰고자 했으나 1단계 만으로도 지쳐버려서 포기를... (하루키상 이래서 달리기를..) 했습니다 ㅠㅠ


다행인것은 어차피 기대하고 계셨던 분들이 없을 것이다라는 것일까요. 휴..


이번화는 딱히 더 드릴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2부에서 다소 들어주기 힘든 발음으로 읽어 드렸던 '독서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전문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책에 관한 것은 방송에서 충분히 다룬 것 같으니 청취자 여러분들께서 직접 감상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방송을 끝까지 듣고 심지어 이 글까지 읽고 계시는 분이 계신다면. 정말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아, 그리고 모두 당연히 알고 계실꺼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무자비하게 방귀를 뀌고 다니지 않습니다. 아니, 애초에 평소에 그렇게까지 많이 뀌지 않아요. 그거 다 농담인거.. 아시죠..? 몰라도 그렇게 알아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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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년백수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의식체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고정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세계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굶주림에 시달리다 빵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킨 농민들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진심으로 그들을 걱정하며 “빵이 없으면 케익을 드세요.” 라고 말했다. 농민들의 세계에서 빵은 없으면 굶어 죽는 것이었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세계에서 빵은 케이크 대신 먹는 것이었다. 물론, 이 말은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이 아니고,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프랑스 농민들은 결국 그녀의 목을 뎅겅 잘라버렸다. 농민들의 세계에서 그녀는 결코 자애로운 왕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렇듯 세계에 실재하는 빵의 형태는 고정적이지만 그 의미는 상대적이다. 그래서 평행우주를 생각하며 매일 밤 책상에 머리를 찧는 과학자가 아니라면 한 인간의 세계는 실재(實在)와 관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품어본 적이 있는가? 모든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밟히는 땅 위에서 감각적으로 음미되는 음식을 먹으며 살아간다. 실재세계는 비교적 고정적이고 시각, 청각, 후각 등과 같은 감각에 의해 즉각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파악하기 쉽다. 반면 관념세계는 형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좀처럼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우리의 무의식 속에 숨어 습관과 고정관념을 통해 우리를 움직인다. 그리하여 그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실체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조차도 힘들다. 그러한 이유로 앞서 보았듯이 우리는 관념세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눈앞의 세계를 모두 실재세계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착각 때문에 때로는 형태가 없는 관념세계가 형태가 존재하는 실재세계를 지배한다. 고장 난 냉장고에 갇혀 얼어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는가? 그 사람의 관념 속에서 냉장고는 몹시 추운 공간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고장 난 냉장고의 실내 온도가 낮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만으로 얼어 죽어 버렸다. 인간의 관념세계는 이토록 강력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라고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세계란 실은 ‘관념세계’인 것이다. 모두가 제각각의 시각으로 (실재)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인간 숫자만큼의 (관념)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관념세계는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 것일까? 아마 그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운 것들로 형성 될 것이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흘러 들어온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관념세계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가는가?


 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굶어 죽을 위험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아프리카의 아이들만큼 나와 차이나지 않는, 그러니까 어느 정도 나와 비슷한 친구들과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거주지가 사회적 지표가 되는 사회에서 비슷한 구역에 사는 친구들끼리 같은 중학교에 배정받았고 3년 후에는 실업계와 인문계로 나뉘어 성적이 비슷한 친구들끼리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다시 3년 후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나와 비슷한 성적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대로 갔더라면 아마도 또 그 중에서 나와 더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을 직장에서 만나게 될 터였다. 그렇게 점점 더 비슷한 사람을 만나가며 나의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그 작은 관념세계를 마치 세계의 전부인 양. 그것이 실재하는 세계의 실체인 양 착각하고 살았다. 지구상에는 70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평생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더 비슷한 사람만 만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작은 세계를 마치 세계의 전체인 양 착각하고 살아가게 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헤세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나의 작은 세계는 알이었다. 나의 그 자그마한 알에 최초로 균열이 발생한 것은 내가 군대에 있을 때였다. 그곳은 그동안 내가 거쳐 온 곳과는 달리 거의 아무런 제약 없이 순전히 운에 따라 모인 사람들의 집합체였다. 그곳에서 난 멸균된 나의 세계에서는 접해보지 못했던 잡종들을 만나게 되었다. 막연히 세상 어딘가에 고졸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보고도 내 기억 속에서 그 사실을 지워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사람이 태어나 밥을 먹고 똥을 누는 것처럼 공부하고 대학 가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고졸자들이 많았고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이미 생업의 길에 나선 이들도 있었다. 그들과 함께한 2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세계에 작은 균열을 남겼고 훗날 나는 그 틈을 발견했다. 틈이 없을 때는 그것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알에 갇혀 있는 새는 그 알이 세계의 전부인줄 안다. 아니 심지어 알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작은 틈새로 스며들어오는 빛을 통해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면 비로소 그것이 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 ‘트루먼 쇼’의 트루먼이 그랬듯이 인간이라면 알을 깨고 더 크고 진실 된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 작은 균열을 두드리고 두드려 이윽고 빠져 나갈만한 문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는 나의 작은 세계에게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night’ 하고는 문을 나서는 것이다.


 이쯤되면 그래서 도대체 이 이야기들이 독서랑은 무슨 상관인데?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 또한 인간이 되고 싶어 그 알을 두드려댔고, 맨 주먹으로는 되지 않으니 책이라는 흉기를 들고 두드렸다는 말이다. 어디 책을 흉기로 삼은 것이 나뿐이던가? 카프카에게 있어 책은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였다. 헤세에게 알은 카프카에게 얼어붙은 바다였으리라.

 군생활의 사분의 삼 정도가 지나갈 때쯤 나는 무료했다. 어느 정도 계급이 올라 해야 할 일은 줄어가는데 국방부 시계는 여전히 느긋했다. 남아도는 시간을 버티기 위해 누군가가 가져다놓고는 무심히 전역해버린 책들을 몇 권 읽어보았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게으름을 피울까 고심하기 위해 집어든 버트런트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한글로 씌어 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랑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슬픈 이야기를 기대하며 읽었던 책은 말로만 듣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아니라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이었다. 그 골치 아픈 것을 읽다가 내가 자살 할 뻔 하였기에 나는 중간까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충분히, 아직 등장하지도 않은 젊은 베르테르가 자살할 만 했겠다 싶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누가 그런 책을 그곳에 가져다놨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동안 시험을 위해 읽었던 책들을 제외한다면 그건 나에게 있어 최초의 독서였고,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 책들은 차근차근 틈을 벌리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군대를 찬양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군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군대의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는 그 부조리와 억압을 나는 증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 그런 경험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관념의 세계는 좀처럼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제대하고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 몇 년을 더 플라톤의 동굴에 수감된 죄수처럼 그림자를 바라보며 살았다. 그러다가 등 뒤에서 쏟아지는 빛을 끝끝내 무시하지 못하고 이내 의아하여 그 틈 앞에 끌려갔을 때. 비로소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틈을 더 벌려 저 빛을 향해 걸어 나가고자 구석에 떨어져 있던, 한동안 버려두었던 책을 다시 주워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독서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의 전부다. 사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도 모두 허상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런 것들과 전혀 상관없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며 그래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 도구가 꼭 독서여야 할 필요도 없다. 한 인간의 입장에서 세상은 넓고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 모든 것들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경험을 선사해주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다만 나의 경우에는 그것이 책이라는 도구로 행하는 독서라는 행위였을 뿐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다른 매체보다 책을 더 신뢰하고 있다. 책만큼 오랫동안 이렇게 방대한 내용을, 이만큼 비교적 오해의 여지없이 전달해온 매체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책이라는 거인의 덩치는 큰 것이다. 그러니 그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다면, 아무래도 더 멀리 보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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