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매주 다양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여기는 감질클럽입니다.
방송이 끝난 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아우를 위하여] 비교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7. 2. 6.

안녕하세요, 희조입니다.
58화 방송 잘 들으셨나요? 엄석대가 아닌 한병태(화자)에게 주목했던 신선한 방송(자뻑), 너무 재밌었어요!(자뻑)

소설에는 엄석대, 한병태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와요. 모두가 상징하는 바가 뚜렷하며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 이문열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유추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6학년이 되자 새로 부임한 담임선생님 캐릭터가 흥미로운데요, 오늘은 이 새담임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방송에서 새담임은 언뜻 아이들을 위하는 굉장히 좋은 선생님처럼 보이는데, 한병태가 새담임에게 느끼는 무었모를 꺼림칙함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가 나왔었어요. 겉으로 보기에 새담임은 엄석대의 비리를 적극적으로 밝혀내어 엄석대의 독재를 끝내고, 불의에 굴해왔던 아이들을 꾸짖고, 학급자치를 통한 민주적 학급체계를 복원시킨 영웅이잖아요. 하지만 병태는 이 담임을 좋아하거나 신뢰하는 것 같진 않았어요, 엄석대 왕국이 무너진 것 자체는 좋지만 새담임을 완전히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기 보단 거리감을 가지고 관찰하는 모습이 나와요.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요.

그런 석대를 보며 나는 또 한 번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 전의 석대는 키나 몸집이 담임 선생님과 비슷하게 보였고,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면 오히려 석대 쪽이 더 큰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데 교탁 위에 꿇어 앉은 석대는 갑자기 자그마해져 있었다.  어제까지의 크고 건장했던 우리 반 급장은 간 곳 없고 우리 또래의 평범한 소년 하나가 볼품없이 벌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 비해 담임 선생님은 키와 몸집이 갑자기 갑절은 늘어난 듯했다. 그리하여 무슨 전능한 거인(巨人)처럼 우리를 내려보고 서 있는 것이었다. 이또한 짐작에 지나지 않지만, 그 같은 느낌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어쩌면 담임 선생님은 처음부터 그걸 노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먼저 해결된 것은 석대 쪽이었는데, 그 해결을 유도한 담임 선생님의 방식은 좀 특이했다.  우리에게 거의 불가항력적이었건만 어찌된 셈인지 담임 선생님은 석대 때문에 결석한 아이들을 그 어느 때보다 호된 매질과 꾸지람으로 다루었다.

그렇게 소리치며 마구다지 매질을 해댈 때는 마치 사람이 갑자기 변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영문을 몰랐으나 그 효과는 오래잖아 나타났다. 우리 중에서도 좀 별나고 당찬 소전거리 아이들 다섯이 마침내 석대와 맞붙은 일이었다.  석대는 전에 없이 표독을 떨었지만 상대편 아이들도 이판 사판으로 덤비자 결국은 혼자서 다섯을 당해 내지 못하고 꽁무니를 뺐다.  선생님은 그 아이들에게  그 당시 한창 인기였던 케네디 대통령 <용기 있는 사람들>이란 책 한 권씩을 나눠 주며 우리 모두가 부러할 만큼 여럿 앞에서 그들을 추켜 세웠다.  그러자 다음날 미창(未倉) 쪽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그 뒤 석대는 두 번 다시 아이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민음사)

새담임은 폭력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아이들에게 위압감을 줍니다. '거인'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아이들은 새담임을 무서운 존재로 인식하게 됩니다. 또한 새담임은 학급의 일부 아이들을 지나치게 추켜 세움으로써 다른 아이들을 비굴한 인간으로 만듭니다. 그 결과, 아이들 사이에서는 선생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 용을 쓰는 모습이 연출되면서 한 마디로 인정투쟁이 벌어집니다. 이쯤되면 아무리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아무리 사랑의 매라고 해도) 폭력이나 인정투쟁을 이용한 교육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지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이 소설은 흔히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를 표절했다는 비난을 받곤 하는데요, 저는 두 소설이 소재는 비슷하지만 아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우를 위하여’에도 엄석대, 한병태, 구담임과 비슷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새담임 캐릭터와는 전혀 다른 여교사가 등장하면서 두 소설은 전혀 다른 길을 갑니다.
 

애들이 앞에 나가서 코끼리 맴돌기를 하고 있을 때, 자치회를 위하여 자리를 피해주었던 선생님이 눈을 휘둥그래 뜨며 놀랐다. “뭘 하구 있는 거예요?”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물었고 영래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벌을 주고 있습니다.” “무슨 벌을?” “얘들이 단체행동에서 빠지려구 합니다.” “단체행동이라니······.” “얘들 때문에 우리가 졌어요. 우리 반의 명예를 위해서 전부 놀이에 참가할 작정이었습니다.” “네, 그런가요. 언제 그 놀이를 해보자구 여럿이서 의논을 했었나요?” 선생님의 한결같이 부드러운 질문에 영래가 대들 듯이 거칠게 대답했다. “아뇨, 하나마나죠. 우리 반을 위해서 나는 모두 참가해야 된다구 생각했습니다.” “물론 여럿이 하는 일에 마음이 모두 맞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각자의 의견도 묻지 않고 혼자의 생각만 주장해서는 절대로 무슨 일에서건 이길 수 없을 거예요. 급장은 책임이 중할수록 누구에게 불만이 없는가를 살피고, 있다면 그 불만이 자기가 저지른 어떤 잘못 때문이 아닌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을 모으겠다는 핑계로 제 잘못을 감추려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자치회 때의 일로 영래와 종하 은수 그애들은 선생님을 점점 미워하게 되었고, 자기네와 별로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소녀라고 눌러보려 했던 것이다. 그애들은 병아리 선생님에 관한 음탕한 욕지거리를 지껄이거나 그이가 돌아서서 칠판에 글씨를 쓸 때 일어나 쑥떡을 먹이며 이상스런 몸짓을 하는 거였다. (황석영, "아우를 위하여", 휴이넘)

이 여교사는 폭력이 아닌 대화를 사용합니다. 부드러운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데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새담임이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물론 여교사의 방법은 부드럽지만 새담임처럼 즉각적인 효과를 보진 못합니다. 여교사의 젊음과 여성성은 아이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우를 위하여'에선 결국 학급의 약자였던 아이들이 힘을 합쳐 영래 무리에 대항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새담임이 직접 엄석대 왕국을 몰아냈다면, ‘아우를 위하여’에서는 아이들 스스로 영래를 몰아냅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해석하자면 새담임은 학급에 민주주의를 '이식'한 사람이지, '선물'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유와 이성을 믿는 합리주의자인지는 모르지만, 계몽의 수단으로 폭력으로 얻은 권위를 이용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자는 아닙니다. 새담임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도가 많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요, 그것은 한국사회가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에 너무 익숙한 탓이 아닐까요? 우리가 폭력에 너무 무딘 까닭이 아닐까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