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고래입니다. 59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방송에서 들려드린 글을 이제야 올립니다. 하하하.
재밌게 읽어주세요. ^^
게으름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고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순 거짓말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내 일기와 지금의 내가 이것을 증명한다. 내가 중학교 3학년, 16살 때 쓴 일기장을 들춰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그대로 옮겨본다.
2006년 9월 24일.
<변화를 위해 지켜야 할 것>
…….
두 번째로 게으름 이겨내자.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너 잘생겨지고 싶지? 너 공부 잘하고 싶지? 너 인기 많아지고 싶지? 너 인정받고 싶지? 너 하고 싶은 것 많지? 이게 왜 다 안 되는 줄 알아? 답은 하나야. 네가 게을러서야. 지금도 이거(일기) 쓰기 귀찮단 생각을 보니 게으름 말기 같다. 오늘 할 일 내일로 미루지 말고 계획 지켜라.
…….
[내일이 또 있으리라 생각하는 마음의 허망함이여, 밤중에 거센 바람이 불면 어찌할 거나 –신란-]
…….
중3의 거대한 욕망에 실소가 터졌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저 욕망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잘생김, 공부, 인기, 인정은 살다 보면 자연스레 분수를 알게 된다. (게으름 이겨낸다고 잘생겨졌으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자극을 주려고 쏘아대는 저 무섭고, 씁쓸한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시절 나는 ‘자극’만 가지고 공부를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씨앗은 초등학교 2학년 수학경시대회 100점을 맞으면 10만 원을 준다는 아버지와의 내기로부터 심어졌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이 내기가 걸린 자극법은 나도 만족했던, 상호합의 된 방법이었다. 돈이 걸린 내기와 함께 나는 승승장구했다. 허나, 아마 중학교 3학년, 일기장에 나온 저 즈음부터 일 거다. 나는 하루, 이틀 벼락치기로는 손쉽게 성적이 안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기에서 주는 자극을 바탕으로 한 단기 노력으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자극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단기 노력의 한계를 느꼈다. 이것을 이겨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꾸준한 노력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허나 이때 내가 취한 방법은 더 큰 자극을 갈구하는 것이었다. 더 큰 자극을 받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점점 더 큰 내기를 거는 것이다. 점점 커지는 내기는 자극을 통한 단기노력을 억지로 장기노력으로 만들 수 있다. 자극이 떨어지려고 할 때마다 끊임없이 돈을 끼워 넣는 거다. 주변에, 대학교에 입학했단 이유 하나만으로 차 선물을 받는 친구들을 보면 혹시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부모님과의 내기가 점점 커져 차까지 따낸 타짜들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허나 우리 집 환경은 그러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보니 넉넉하지 못한 환경 덕분에 부모님과의 내기가 그 시절 끝났다는 것은 한편으론 다행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님과의 내기판을 전전했을 것이다.
결국, 나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더 큰 자극을 위한 두 번째 방법은 내기를 통한 자극에서 스스로를 다그치는 자극으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나를 거칠게 다그치기 시작했다. 위에 적어둔 일기장에 나온 쏘아대는 질문과 명령은 약과였다. 나는 이런저런 말들로 나 자신을 다그쳤다. 그래도 끄떡없을 땐, 내 주변에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나서 엄청난 자극이 날 지배하길 바라기도 했다. 생각해보건대, 아마 이것은 첫 번째 방법인 내기의 부작용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다그치는 습관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를 다그치는 것. 대개 적당한 자책은 좋은 자극제가 된다고 한다. 허나 이 말은 자극의 힘을 의지한 채 살아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로 들린다. 좋은 자극제가 되는 순간 적당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과하게 나를 다그치게 되고 이 자책은 지독한 무기력함으로 변질하고 만다. 이 무기력함은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무기력함에 한 번 빠지면 며칠, 몇 주는 순식간이다. 그러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나는 이 무기력함을 아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이 무기력함에 빠지며 살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날 이리도 다그치는가. 이 다그침 안에 항상 포함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게으름이다. 나를 10년간 다그치게 한 것의 핵심엔 바로 게으름이 존재한다. 우선, 나는 정말 게으를까? 가끔, 누군가 내 천성이 어떤지 확실히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한다. 부족한 부분만 채우며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허나, 나는 게으름에 대해선 이 대답을 스스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지금의 내 기분 때문도 아니고, 나를 다그치기 위함도 아니다.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는 게으르다. 혹시, 나는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데 내 기준이 높거나 혹은 세상의 혹독한 기준들 아래서 나는 게으른 것이 아닐까? 아니다. 나는 게으르다. 이 확신은 다름 아닌 10년이 넘는 일기장의 내용에서 나온다. 2005년, 자발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때부터 2017년 가장 최근까지 어느 해의 일기장을 펴 봐도 게으름과 나의 싸움은 여전하다. 나는 게으름에 자책하고, 부지런해지자고 다그치고 있다.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레퍼토리는 반복된다. 분명 그때와 난 다르지 않다.
자, 10년이란 세월이 증명하듯, 나는 내가 게으르단 것을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제껏 나는 내가 게으르단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일까. 혹은 부지런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이 두 생각으로 살아본 세월도 10년간의 일기장에 충분히 녹아 있는 것 같다. 나는 이제 내가 게으른 것에 대해서 온전히 인정해보려 한다. 일기장에 담긴 10년의 세월은 이 인정이 나를 책망하는 것이 아닌 그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다독여준다.
그렇다고, 게으른 채로 살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부터 협상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 협상 테이블은 ‘욕망하는 나’와 ‘게으른 나’ 사이에 펼쳐져 있다. 우선 욕망하는 나는 욕망의 기준을 엄청나게 낮출 필요가 있다. 아마 모든 고통의 시작은 완벽해지고 싶은 성격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참 대단한 것은 완벽이란 것이 불가능하단 것을 알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미 게으른 인간임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은 거 완벽함은 이제 제쳐놓자. 욕망의 기준을 낮추는 것은 목표치를 낮추는 것과 연결된다. 1월 한 달 동안, 원하는 목표 점수에 도달하기 위해 영어 공부에 집착했다. 1, 2월 내내 해야 할 장기레이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초조함과 다급함으로 공부를 했다. 결국, 설날을 기준으로 나가 떨어졌다. 한번 공부를 손에 놓다 보니 2월에 세운 공부 계획도 지키기 싫어졌다. 지칠 때로 지친 나는 다시 영어책을 펴기가 싫어졌고, 설 내내 공부하지 않은 것은 나를 더 짓눌렀다. (하지만, 게으름에 관한 글감이 떠오른 덕분일까. 나는 ‘게으른 놈이 그럴 수도 있지’하며 책을 다시 폈다. 그렇다. 나는 원래 이런 놈이다) 분명한 것은 ‘욕망하는 나’는 과한 목표가 나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는 점을 항상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식은 죽 먹기 정도의 목표가 아니면 세우지 않으려 한다. 게으른데 어떡하겠나. 자, 동시에 ‘게으른 나’가 해줘야 하는 것이 있다. 식은 죽 정도는 꾸준히 먹는 거다. 지금도 머릿속엔 ‘식은 죽 먹기를 계기로 조금씩 성실해져 보는 건 어떨까’란 생각이 들지만, 이것 또한 과한 욕망이다. 그냥 ‘게으른 나’가 할 수 있는 정도만 꾸준히 하자. 그것뿐이다.
나는 게으른 나를 채찍질하기 위해 자극이 필요했고, 그 자극은 나를 다그침으로써 만들어졌다. 애초에 나를 변화시킬 방법으로 자극을 사용한 것부터가 모든 꼬임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나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 웬만하면 나를 다그치지 않으려 한다. 이 다그침이 주는 자극은 아무래도 흉터가 남는 채찍질인 것 같다. 나이가 먹을수록 이 채찍질은 이전의 흉터를 욱신거리게 하고, 새로운 상처는 아물 시간조차 충분치 않다. 대신 나는 할 수 있는 정도만 꾸준히 해보려 한다. 내가 아주 작은 것만 꾸준히 해도 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단 것에 확신을 가진 것은 이 글을 쓰기 위해 펴본 10년간의 일기장 덕분이 아닌가 싶다. 한 달에 한, 두 편이라도 쌓인 10년간의 일기는 나를 고스란히 드러내 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 글을 계기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됐으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순 거짓말은 아니겠다.
-추가-
책이랑 톡톡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살다 보면 그저 옆에 계속 두고 싶은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책이랑 톡톡은 내게 그런 존재다.
사실 책이랑 톡톡이 내게 주는 영향과 고마움에 대한 표현은 조금 아껴두고 싶다. 정확히 말하면 섣불리 말하고 싶지 않다. 조금 더 영향을 받고 멋지게 표현하고 싶은 욕심일까. 아니, 책이랑 톡톡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이랑 톡톡을 통해 8개월간 30권 이상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잘 모르겠다. 조심스레 말할 수 있는 것은 안 해본 생각을 하게 해줬다는 것 정도이다. 8개월 가지고 이런 것을 논하는 자체가 웃긴 이야기임을 안다. 그래서 나는 책이랑 톡톡과 오랜시간 함께 하고 싶다.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꾸준히 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깊은 애정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이 것은 한낱 말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진심이다. 나는 책이랑 톡톡에게 이러한 진심을 건네주고 싶다. 언젠가, 나처럼 행동보다 말이 앞서온 사람에게는 너와 꾸준히 한 것이 더욱 힘든 일이었음을, 그래서 깊은 진심이었음을 생색내고 싶다.
*그림 출처. "장난꿈공장-그림도안, 색칠공부" http://coloring-pages.tistory.com/2367
'방송이 끝난 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데미안] go back (1) | 2017.02.26 |
---|---|
[데미안]안으로 파고들기 (1) | 2017.02.25 |
[판결vs판결] 법률 지대넓얕 (2) | 2017.02.18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뒤풀이 (3) | 2017.02.12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요가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0) | 2017.02.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