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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끝난 뒤

[그리스인 조르바] 조르바의 육감은 이성보다 또렷하다.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7. 1. 8.

안녕하세요, 희조입니다.
54화 방송 잘 들으셨나요? 
그리스인 조르바는 워낙 유명한 책이라 부담도 많이 됐었는데, 재밌게 들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평범하게 자랐습니다. 평범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평범한 집에서 자라 평범한 교육을 받고 평범한 음식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이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색무취한 내 삶은 아주 재미없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제게 말했습니다. "넌 평범하게 자란 게 아니라 ‘귀하게’ 자란 거야"

너는 평범한 부모 밑에서 자랐지. 부모님의 불화를 겪지 않았을 테니까.
너는 평범한 집에서 자랐지.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피곤함을 모를 테니까. 
너는 평범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 학원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너는 평범한 음식을 먹으며 자랐지. 먹고 싶은 걸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을 이해 못했지. 너는 언제든 먹을 수 있었을 테니까. 
너는 평범하게 자랐지. 네 주위엔 너 같은 친구들만 있었을 테니까.

그 친구는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이때까지 내가 너무 좁은 세상에 살았구나 라는 걸 알았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의 폭이 굉장히 좁다는 것,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나는 무척 특별한 조건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평범함’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특별한 사건이나 결핍 없이 자란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삶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학에 와서 그동안 몰랐던 사회를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불필요한 관습과 규율에 속박되어 살아가는지,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주요 매체는 책과 영화였습니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성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해놓은 책을 읽고 사람들과 그것에 대해 토론하곤 했습니다. 영화나 다큐멘터리로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역사적 장소를 방문하거나 실제로 어려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약자들의 불행을 책이라나 영화로 소비하며 저의 소수자 감수성에 자주 탄복합니다. 가끔은 사회문제에 관한 글을 써 돈을 벌어먹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조르바는 저와 무척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크레타 독립전쟁 의용군으로 뛰었으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잡상인이자 막노동꾼이었습니다. 제가 평범하게 자랐다면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삶을 닥치는 대로 어떻게든 살아낸 경우에 가깝습니다. 일찍 세상에 내던져져 누구의 도움 하나 없이 살아가야 했던 삶, 그의 삶은 아마 누구보다도 혹독했을 겁니다. 그런 경험으로부터 그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추악한 모습부터 먹고사는 것에 목숨 거는 인간 근원의 생존 본능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웃고 떠들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취하고 춤추는 인간의 희로애락 또한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르바는 세상을 이성보다는 직관으로 판단합니다.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것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328p, 열린책들)

“자하리아 신부, 성모께서 기적을 보이실 거였으면 놈들이 수도원을 불태우기 전에 하셨어야지, 왜 그러지 못하셨을까요?”
조르바가 물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이지요.”
수도승이 성호를 세 번 그으며 대답했다.
“전능하신 하느님 좋아하시네. 어서 갑시다”
조르바가 중얼거리며 다시 노새 등에 뛰어올랐다. 

국가와 하느님으로 표상되는 절대적 권위에 대한 그의 풍자가 돋보이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조르바가 인생을 통해 배운 원초적인 육감에 기인한 것입니다. 따로 공부를 하고 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보다 혹은 그들 못지않게 명징합니다. 경험으로 습득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때로 너무 표현이 원초적이어서 거부감이 들긴 하지만요.

'조르바'의 저자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생전 저작 때문에 그리스 동방정교회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조르바'에서는 수도승이 제정신이 아닌 모습으로 여러 번 등장합니다. 수도승이 수도원에 직접 불을 지르기까지 합니다. 이런 묘사들은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봤을 때 충분히 신성 모독감이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종북세력으로 몰렸을까요?) 카잔차키스의 무신론적 성향이 문제가 되어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했다는 설도 있습니다(2번 후보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책으로 배운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내가 보는 세상은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보는 것만 보일 테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학자는 우대하되 생활인들은 경시하는 세상입니다. 이론은 우대하되 현실은 경시하는 세상입니다. 선거 포스터에 '00학교 00과 박사학위 취득'이라는 학력이 적혀있으면 왠지 마음이 기우는 세상입니다. 조르바가 지금 우리 곁에 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는 조르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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