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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끝난 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 울기엔 좀 애매한] 분노할 용기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6. 9. 26.

 안녕하세요 중년백수 입니다.

 39화 방송은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과 최규석의 '울기엔 좀 애매한'을 읽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제가 이번 방송을 통해 이야기 나눠보고 싶었던 것은 '개인은 시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였습니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에 나오는 안토니오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안토니오가 패배자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중간중간에 포기하기도 하지만 최소한 조금이라도 저항하고자 발버둥 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시대에 짖눌려간 안토니오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씁쓸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팟빵에 자주 댓글을 달아주시는 너무나도 감사한 zendo님의 댓글을 보고 '미움받을 용기'를 빌려서 읽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50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고 말았습니다. 이 책이 나쁜 책이여서는 아닙니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읽어 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받을 용기'는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하는 어느 철학자와 그에 반대하는 한 청년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철학자는 '누가, 어떻게 봐도 세계는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한 곳이 아니냐'는 청년의 질문에 '그것은 세계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자네가 세계를 복잡하게 보고 있기 때문일세'라고 답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있으면 변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말이죠.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마지막 말만 아니었으면 저 또한 어느정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 같습니다. 분명 철학자의 말은 '특정'한 인간들에게는 유의미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바로 관념의 세계로 부터 오는 불행에 시달리는 사람들 입니다. '인간 실격'편에서 저는 인간의 삶을 '생활세계'와 '관념세계'로 구분지었습니다(인간 실격 편 들으러가기). 인간의 관념세계는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180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활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배고픔이나 추위와 같은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간혹 초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아무리 덥다고 생각해도 한겨울에 장시간동안 반팔을 입고 돌아니기는 힘듭니다.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에는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부지기수 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났는데 나라는 곳곳에서 전쟁중이고 아무리 열심히 살아봐도 배는 더 고파만 갑니다. 그런 아이에게 어느 날 제가 찾아가 '미움받을 용기'를 건내주며 '얘야 너는 용기가 없어서 그런거야,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만 있다면 너도 행복해질 수 있단다'하면 그 아이가 뭐라고 할까요? 이 아이 앞에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넘어설 수 없는 시대가 버티고 서 있습니다(가끔은 그러한 시대를 넘어선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을 들먹이며 나머지 사람을 폄하할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기도 전에 유럽의 열강들이 그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고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관조하며 뒤에서 부추키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신수양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 할까요? 하루에 열시간 일해서 겨우 일달러를 벌 수 있으면 앞으론 스무 시간을 일해야 할까요?

 철학자가 말하는 아들러의 심리학에 수긍이 가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프로이트의 트라우마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것 입니다. 어린시절 부모의 학대로 인하여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 청년의 친구 이야기에 철학자는 학대라는 과거의 '원인'이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목적'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현재 어떤 행동을 하는데에는 과거의 특정 사건이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청년의 친구가 집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과거 부모에게 학대받았던 경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집에서 나가지 않음으로써 더 관심을 받고자 하는 현재의 목적 때문이라고 철학자는 말합니다. 이것은 얼핏보면 말장난 같이 들립니다. 그렇다면 청년이 현재 그러한 목적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 이유가 없을까요? 철학자는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한다고 하는데 왜 하필 경험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을까요? 과거의 어떤 사건이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까요? 철학자는 그저 트라우마를 부정할 뿐 입니다. 과거의 일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오직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목적만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므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분명 어느 정도 상황에 따라 맞는 말이지만 과거의 사건으로 부터 발생한 트라우마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오직 트라우마만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 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주장으로 보입니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가 발생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분명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는 이 과거를 깡그리 무시하기 때문에 마음먹기에 따라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행복해질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 입니다. 시대란 과거의 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풍경은 역사가 누적되어 만들어진 것 입니다. 또한 우리는 누구도 그 시대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삶이 과거와 무관할 수 있을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180도 바뀔 수 있을까요? 분명 그런 조건에 처한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아 보입니다.

 어느 티비프로그램에 한 운동선수가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랫동안 프로농구선수로 활약한 그 선수는 선수시절 번 돈을 가지고 은퇴한 후에 건물을 구매하여 많은 임대수입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편하게 먹고 산다는 장난섞인 말에 그 선수는 약간 정색하며 십여년간 열심히 농구를 한 정당한 댓가다.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선수의 표현에 따르면 다소 부유한 자신의 생활은 모두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 선수의 노력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노력한 모든 사람이 그 선수만큼 인정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190센티가 넘고 체격이 우람한 그 선수의 재능은 21세기가 아니라 11세기의 한반도에서 태어났으면 부려먹기 좋은 노예의 자질로 발휘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현재 우리 사회의 운동선수나 소수 연예인들의 어마어마한 수입에는 승자독식주의와 현재의 자본주의 체재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말하자면 너무 길어지므로 저만의 생각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선수가 누리고 있는 것은 결코 자신의 노력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시대를 잘 타고난 덕도 한 몫 했을 겁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해보면 '미움받을 용기'가 왜 한국에서 이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한국은 경제규모가 세계 10위 안에 드는 나라 입니다. 분명 생활세계가 곤란한 나라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행복지수는 낮습니다. 지옥불반도,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횡횡하는 것을 보면 불행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그 이유 중 하나로 빈부격차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자신의 생활세계가 절대적으로 빈곤하지 않더라도 주변사람과 차이가 많이나면 우리의 관념세계는 우울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한국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먹고 살 만 한데도 불행하거나 스스로 먹고 살만하지 않다고 느끼는 분들에게는 이 책이 유효한 처방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오는 병은 마음으로 치유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분명 '미움받을 용기'는 저 또한 주변의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먹고 살만하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개인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빈부격차가 부당한 이유로 발생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것은 개인의 마음을 치료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치료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러의 철학은 이렇게 변질될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워 하지마, 마음을 달리 먹으면 너는 행복해질 수 있어. 사회 탓 하지마 너 하기에 달려있어'. 저는 절대 '미움받을 용기'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책 자체만 놓고 보면 수긍이 가는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소화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부당한 현실 앞에서 저항하기 보다는 정신승리하게 만드는 자기계발의 늪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리고 부당한 현시대를 정당화시킵니다.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시대에 부딪히기 보다는 어떻게든 나를 바꿔서 행복해지겠다는 정신승리가 훨씬 실현가능성 있어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토니오 같은 인간들은 그런 요령도 없습니다. 한술 더 떠서 정신승리할 여유도 없는 사람들, 혹은 상황도 많습니다.

 최규석의 '울기엔 좀 애매한'은 그런 청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원빈과 은수는 재능은 있지만 그들이 처한 현실 때문에 꿈이 좌절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알바를 두개해서 안되면 세개, 네개 해서라도 이루어 내라고. 할 수 있다고. 너의 노력이 모자란 탓이라고.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성공을 거머쥔 사람도 있을 것 입니다. 나의 노력에 대한 어느 정도 정당한 대가가 주어진다면 속편하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보다는 그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에게 더 노력해서 빠져나오라고 요구하는 것 일까요? 왜 부당함 앞에 분노하지 못하고 부당함을 받아들이고 극복하기를 채찍질 하는 걸까요?

 며칠 전 영화 '터널'을 보았습니다. 영화 자체는 별로 재미없었지만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심장했습니다. 영화 터널은 정수(하정우)가 차를 타고 지나가던 하도터널이 붕괴하여 그 밑에 깔린채 구조되기를 기다리는 과정을 묘사한 영화 입니다. 영화 초반에는 사람들이 정수를 구출하기 위해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정수의 아내인 세현(배두나)는 그런 사람들의 호의에 감사를 느끼며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부실공사와 부실설계로 인해 구출작업은 더뎌져만 가고 슬슬 정수의 구출 작업에 불만을 지닌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주변 신도시 공사 관계자들은 정수의 구출 작업 때문에 공사를 중단한 하도2터널의 공사를 재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공사를 재계할 경우 정수가 깔려있는 하도터널의 추가 붕괴가 예측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피해액이 너무 커져간다며 오히려 정수와 그의 아내를 비난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 와중에 구조현장에서 사고로 사람이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러자 피해자의 유족은 현장에서 밥을 하던 세현을 찾아와 너 때문에 우리 아들이 죽었다며 세현을 향해 분노를 표출합니다. 결국 세상의 비난에 지친 세현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정수의 구조작업을 포기하고 2터널 공사재계문서에 사인을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정수는 구출이 됩니다.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었겠죠. 저는 이 영화를 보며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부실설계를 하고 부실공사를 한 정작 이 모든 사태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등장하지 않는가? 입니다. 정수는 가장 큰 피해자 입니다. 그런 피해자가 영화속에서 어느새 가해자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제2터널 공사가 지연된 피해금액은 얼마가 되었든 제1터널 관계자들이 물어야 합니다. 구조현장에서 작업중이던 사람이 죽은 것 또한 정수와 그 가족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 모든 사태는 부실설계와 공사를 한 터널 관계자들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영화속에서 그들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세현은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를 모르고 구조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의 어머니는 엉뚱한 세현에게 분노를 표출합니다. 저는 이것이 분노할 줄 모르고, 그저 울기엔 좀 애매하다가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마는 우리가 사는 한국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터널'은 여러모로 세월호를 떠올리게 합니다. 세월호 사고도 처음에는 국민적 애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사태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겹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월호 유가족 분들께 '미움받을 용기'가 도움이 될지 저는 의문입니다.

 영화 '터널'에서 구조된 직후에 정수가 하는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구조현장에서 들것에 실려가는 정수의 길을 막고 기자들은 각자 특종에 눈이 멀어있고 정부의 고위관료자들은 기념사진을 찍자고 몰려듭니다. 한 말씀 해달라는 요구에 정수는 구조대장(오달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다 꺼져 이 개새끼들아"

 

 정수의 분노는 합당해 보입니다. 무조건 남탓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덮어놓고 내 탓만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정당하게 책임이 있는 대상에게 분노할 줄 아는 것. 나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 못지 않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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