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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끝난 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죽음의 두 가지 형태에 대하여 - 2부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6. 9. 25.

 안녕하세요 중년백수 입니다.

 앞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죽음의 두 가지 형태에 대하여 논한 적이 있습니다.

 1부 보러가기

 이번에는 예고드린데로 두 가지 형태의 죽음을 극복하는, 혹은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 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부에서 죽음을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첫째는 시체가 되는 생물학적 죽음이고 둘째는 좀비가 되는 사회적 죽음입니다. 첫번째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지만 두번째 죽음은 완벽할 수는 없을 지언정 어느 정도는 극복 가능한 유형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두 번째 유형의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오롯이 나의 삶을 살았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칸트에게 물어보면 '정언명령'에 따르는 삶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자에게 물어보면 예로 돌아가 인이 되라고 할까요? 사르트르라면 '자유'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내요. 어떤 방법이 해결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방법이든 처음에는 현재 자신의 삶을 의심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들이 속한 사회에 깊게 연관된 채 살아갑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사실 많은 것들이 외부 환경으로 인해 이미 결정되어진 채 살아갑니다. 성인이 되면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하며 결혼적령기가 되면 결혼을 하는 삶은 언제부터 인간의 보편적인 삶이 된 것일까요? 그리고 과연 언제까지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형태일까요? 우리는 지금 그러한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지만 조금만 과거나 미래로 가보면 그것은 이상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앞서 말한 형태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자발적으로 그런 삶을 원하고 선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저 의례 남들이 그렇게 살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그렇게 따라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평생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정해진 삶을 무난하게 잘 살아낸다면 그것도 나름 보람찬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인간성을 끝끝내 억누르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왜 이렇게 사는거지? 왜 사는거지?'라는 회의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면 삶은 지옥으로 변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평소에 스스로에 대해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은 정녕 내가 원해서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좀비에서 탈출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나는 지금 좀비처럼 살고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 입니다.

(때로는 타인의 욕망을 좇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더라도 그것 외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반 일리치 처럼 사소한 사건에 옆구리가 아파올지도 모릅니다. 죽을정도로 말이죠.)

 이번에는 첫 번째 유형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 논해보겠습니다. 두 번째 유형의 죽음과는 달리 첫 번째 유형의 죽음은 극복이 불가능합니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말이죠. 모든 인간은 태어난 이상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 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차피 인생은 돌고도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에게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죽음과 우리의 삶은 공존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그것을 굳이 상상해가며 두려워 할 필요 없다는 뜻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부정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현상 앞에서 불안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두번째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애써도 부정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현상에 맞서 삶의 의미를 완성시키는 것 입니다. 여기서 완성이란 실제로 무엇을 어떠한 형태로 종결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예컨데 완벽하게 실현시키지는 못 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지켜나가며 실천했다면 설령 그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그것은 삶의 의미를 완성시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송 중에 말씀드렸던 닥터 히루루크와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끝내 자신들이 신념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신념을 지키고 완성시키기 위한 삶을 살았고 그 의지를 이어나가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후회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말한 죽음의 형태만이 죽음을 맞이하는 건강한 자세는 아닐겁니다. 좀비도 행복하게 죽을수 있고 그게 꼭 나쁜 것도 아닙니다. A와 B가 반대되는 경우 A를 좋게 말했다고 해서 꼭 B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만 제가 꿈꾸는 죽음의 형태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 뿐이었습니다.

 이번 방송이 책이랑 톡톡을 들어주시는 여러분들께 각자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라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방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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