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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끝난 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죽음의 두 가지 형태에 대하여 - 1부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6. 9. 10.

안녕하세요 중년백수 입니다.

책이랑 톡톡 서른 여섯번째 이야기는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방송 중에 저는 죽음의 2가지 형태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요. 다소 미흡한 점이 있고 보완할 점이 있는 것 같아 글로 남깁니다.

 

저는 죽음을 2가지 형태로 분류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죽어서 시체가 되는 생물학적 죽음입니다.

둘째는. 죽어서 좀비가 되는 사회적 죽음입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이 두 유형의 죽음이 늘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는 점 입니다. 완전히 따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동시에 발생하기도 합니다. 즉, 사회적 죽음이 생물학적 죽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생물학적 죽음에 도달했을 때 자신의 사회적 죽음 상태에 대한 자각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두 죽음이 각각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보겠습니다.

 

첫째는 말 그대로 노화, 혹은 어떤 사고, 또는 자살로 인해 신체의 활동이 정지된 사건 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죽음이겠죠?

둘째는 사실상 생물학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죽음 입니다. 세상 어딘가에서 기적적으로 몇 번 정도 발생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죽음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죽어서 시체가 되지 않고 계속 활동하는 것이 말이죠. 좀비는 본래 서아프리카에서 건너와 아이티 및 남아메리카에서 발화한 부두교에 나오는 존재 입니다. zombie의 어원은 아프리카의 콩고어로 은잠비(nzambi)라고 합니다. 은잠비는 신 또는 영혼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좀비는 본디 '영혼'을 뜻하는 단어였다고 합니다. 부두교가 성행했던 시기에 아이티에는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아이티에서 중죄인은 그 벌로 영혼을 빼앗기고 철저하게 노예처럼 시키는 대로 노동을 하도록 처해졌다고 합니다. 즉, 좀비를 빼앗긴 것 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빼앗기고 '시체처럼 된 노예'를 좀비라고 부르던 것이 오늘에 와서 '움직이는 시체'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좀비 이야기가 많습니다. 영화나 소설에서도 흔히 등장하지요. 아무 의미나 의지 없이 등하교 혹은 출퇴근만 반복하는 학생이나 직장인을 빗대 좀비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영화 시선 사이(2015)의 한 장면입니다. 단편 '우리에겐 떡볶이를 먹을 권리가 있다'에 등장하는 지수는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각종 말도 안되는 규제를 만들어 학생들을 통제하려는 학교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샘! 그게 도대체 우리를 위한 겁니까? 학교를 위한 겁니까?"

지수의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여기에 있는 한, 너희들은 그냥 좀비라고 생각해. 대학가면 사람된다 좀비씨. 다 니들 좋으라고 하는거야."

주변을 둘러보면 스스로를 좀비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흔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좀비'라는 존재가 우리 사회에 이렇게 빈번하게 등장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건 아마도 그만큼 우리 사회에 생각없이 사는, 혹은 생각이 없어야만 살 수 있는 좀비 같은 형태의 삶이 많아졌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죽음은 곧 그것이 자의였던 타의였던 간에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는, 영혼없는 삶, 살아도 사는게 아닌 삶을 뜻합니다. 저는 이것을 사회에 의한 개인(영혼)의 죽음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적(혹은 사회에 의한) 죽음'이라고 명명하겠습니다.

다시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철저하게 사회에서 요구한 대로 살아간 인물입니다. 즉 '좀비'였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반 일리치가 지닌 모든 의미는 오로지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나오는 것 입니다. 그의 지위, 그의 인맥, 그의 학력 따위 만이 그를 설명해줍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이반 일리치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를 둘러싼 지위, 인맥, 학력 등등 사회적 지표가 사라지면 이반 일리치도 사라지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한 인간이 사라져가는 것을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그의 후임자가 누가 될 것인가, 카드모임의 공석은 누가 채울 것인가, 그의 죽음으로 받게 될 연금은 얼마인 것인가와 같은 것들만 남습니다. 단 하나, 그의 아들만이 죽기 전에 그에게 찾아와 이반 일리치라는 개인의 죽음 자체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고 이반 일리치는 그로 인해 구원받습니다.

따라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생물학적으로 죽어가고 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실은 좀비처럼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한가지 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사실 그렇게 늙은 사람도 아니고 아주 사소한, 옆구리에서 시작된 알 수 없는 통증 때문에 죽어갑니다. 저는 이것이 정말로 신체적 통증이 아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허무, 혹은 어떤 이유에서 였든지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었다는 막연한 자각(혹은 내가 왜 사는거지?와 같은 삶의 무의미)에서 비롯되는 불안에 대한 메타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반 일리치는 아마도 어느 날 문득 사소한 일을 계기로 자신에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겁니다(책에도 몇몇 그런 부분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좀비로 살아온 탓에 그 막연한 불안감의 정체를 도무지 밝혀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계속됩니다. 그런 부조리한 상태는 결국 그의 생물학적 생명까지도 위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생물학적 죽음은 결국 그의 사회적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부에서는 죽음의 2가지 형태에 대해 정의해 봤습니다. 글로 쓴다해서 특별히 더 나아지는 점도 없는 것 같내요. 여전히 두루뭉술해서 죄송합니다. (ご.,ご;;)

그럼 읽으시는 분이 한분이라도 계시는 것 같으면 2부에서는 죽음을 극복하는 2가지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2부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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