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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끝난 뒤

[고래] 박완서 작가의 '말 맛'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9. 2. 3.

안녕하세요. 51화 박완서 작가의 <엄마의 말뚝> 재밌게 들으셨나요? 1년만에 놀러온 (과수원 딸이라) 과즙이 넘치는 제주씨, 요즘들어 결혼에 관해 생각이 많은 마브누나와 함께 재밌는 녹음을 한 것 같습니다.

방송 전반부에 마브누나가 소설의 '말 맛'에 대해 이야기 했죠. '번역된 외국소설을 읽다가 자국어로 된 소설을 읽으니 '말 맛'이 느껴져 좋았다.' 저 역시 이 말에 백번 공감을 합니다. 훌륭하게 번역된 외국 소설도 많지만, 작가가 한 글자, 한글자 정.확.하.게. 눌러담은 글과는 어딘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박완서 작가는 이 말맛을 더욱 잘 살린 작가인 것 같구요. 

오늘은 <엄마의 말뚝1,2,3>에서 제가 뽑은 '말 맛 BEST5'를 소개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명절 보내시길 바랍니다.

#1
아아, 저런 상것들하고 상종을 하며 살아야 하다니…
엄마는 툭하면 상것들이란 말을 잘 썼다. 늙은 부모에 어린 자식이 올망졸망 딸린 안집 남자가 첩을 얻어 들여서 본처와 한방에서 기거케 하는 걸 보고도 아아 상종 못할 상것들이다, 하면서 몸서리를 쳤다. 그럴 땐 안집한테 덮어놓고 쩔쩔맬 때와는 딴판으로 엄마는 느닷없이 기품이 있어졌다. 돋보이게 귀골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서울서 나를 데리러 시골집에 내려왔을 때도 엄마는 그랬었다. 그때 엄마는 서울이라는 대처를 후광삼고 그럴 수 있었지만 지금의 엄마는 무얼 믿고 저렇게 도도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아마 엄마가 배신한 온갖 과수가 있는 후원과 토종국화 덤불이 있는 사랑뜰과, 정결하고 간살 넓은 초가집과 선산과 전답과 그 모든 것을 총괄하시는 비록 동풍은 했으되 구학문이 높으신 시아버지가 뒤에 있다고 믿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게 엄마의 긍지라면, 먼저 것은 엄마의 허영이었다. 

#2.
엄마는 자기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이상향과 당장 처한 현실과의 갈등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자식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식이 겪는 갈등에 대해선 무지한 편이었다. 나는 동네에서도 친구가 없었지만 학교에서도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학교 친구들은 모두 그 근처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저희들 끼리끼리였다. 그 끼리끼리가 저희들끼리 싸우고 바뀌고 편먹고 할 뿐이지, 처음부터 어떤 끼리끼리에도 안 속한 이질적인 아이에 대해선 배타적이고 냉혹했다. 나는 가끔 혼자서 거울을 보면서 내가 어디가 어떻게 남과 달라서 여기저기서 따돌림을 받나를 이상하게도 슬프게도 생각했다. 한동네 사는 애들하곤 격이 다르게 만들려고 엄마가 억지로 조성한 나의 우월감이 등성이 하나만 넘어가면 열등감이 된다는 걸 엄마는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우월감과 열등감은 다같이 이질감이라는 것으로 서로 한통속이었다. 

#3.
나는 옛날의 등성이를 넘기를 단념하고 새로 쌓아 내려가고 있는 성벽을 따라 사직터널 방향으로 내려왔다.
샌들 속으로 모래가 들어온 걸 벗어서 털면서 나는 문득 실소를 터뜨렸다. 어머니가 낯설고 바늘 끝도 안들어가게 척박한 땅에다가 아둥바둥 말뚝을 박으시면서 나에게 제발되어지이다라고 그렇게도 간절히 바란 신여성보다 지금 나는 너무 멋쟁이가 돼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신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어머니가 생각한 것으로부터는 얼마나 얼토당토않게 못 미쳐 있는가 엄마의 생각은 그 당시에도 당돌했지만 현재에도 역시 당돌했다. 엄마의 억지는 그뿐이 아니었다.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근거를 심어줌으로써 도시에서 만난 웬만한 걸 덮어 놓고 무시하도록 부추기다가도 근거의 고향으로 돌아가신 서울내가 흉내를 내도록 조종했다. 
어머니가 세운 신여성이란 것의 기준이 되었던 너무 뛰떨어진 외양과 터무니없이 높은 이상과의 갈등, 점잖은 근거와 속된 허영과의 모순, 영원한 문밖 의식, 그건 아직도 나의 의식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의식은 아직도 말뚝을 가지고 있었다. 제 아무리 멀리 벗어난 것 같아도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일 것이다.

#4.
오빠의 살은 연기가 되고 뼈는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어머니는 앞장서서 강화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우린 묵묵히 뒤따랐다. 강화도에서 내린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멀리 개풍군 땅이 보이는 바닷가에 섰다. 그리고 지척으로 보이되 갈 수 없는 땅을 향해 그 한 줌의 먼지를 훨훨 날렸다. 개풍군 땅은 우리 가족의 선영이 있는 땅이었지만 선영에 못 묻히는 한을 그런 방법으로 풀고 있다곤 생각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모습엔 운명에 순종하고 한을 지그시 품고 삭이는 약하고 다소곳한 여자 티는 조금도 없었다. 방금 출전하려는 용사처럼 씩씩하고 도전적이었다.
어머니는 한 줌의 먼지와 바람으로써 너무도 엄청난 것과의 싸움을 시도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그 한 줌의 먼지와 바람은 결코 미약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머니를 짓밝고 모든 것을 빼앗아간, 어머니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단이란 괴물을 홀로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5.
그로 미루어 어머니의 환각에 나타나는 다른 이들도 어머니를 주역으로 한 어머니의 인생에선 미미한 엑스트라로 스쳐간 이들에 지나지 않을 성싶었다. 그렇다면 참 이상도 하지. 변의조차 퇴화된 몽롱한 의식 속에서 하필 그 엑스트라들이 튀어나올 건 또 뭔가. 여느 때도 아닌, 장장한 인생의 막을 내리려는 이 금쪽 같은 시간에. 인간 의식의 불가사의가 조금도 신비하거나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고, 조잡한 허구처럼 여겨져 무안스럽기도 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인간을 위해서. 혹시 어머니는 지금 일생일대의 마지막 연기를 하고 있는 거나 아닐까, 당신 의식의 밑바닥에 찰싹 늘어붙은 걸 꼭꼭 감추기 위해 부스러기만 내보이는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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