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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전쟁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 1.전장까지의 거리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6. 2. 17.

“겪어보지 못한 자에게 전쟁이란 달콤한 것이다.” - 에라스뮈스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다른 이들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심지어는 실존 인물이 아닌 영화, 드라마 속의 가상 인물들의 그것도 포함해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다시는 전쟁을 다룬 작품을 보지 못할 것이다. 영화관에서 전쟁 영화를 보다 말고,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는 자신을 보게 되리라. 미친 사람 보듯이 하는, 주위의 시선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공포에 질려서.

근거 없는 가정은 아니다. 물론 초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전쟁을 직접 겪어본 이들은 더 이상 전쟁을 즐기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실제 사례가 있다. 98년 개봉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기억 하는가? 이 영화의 배경인 2차 세계대전에 참전 했던 많은 사람들이 관람 후에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서 자신이 겪었던 끔찍한 경험이 다시 떠올라서 이다. 아예 관람을 거부한 이도 있다. 태평양 전쟁을 다룬 드라마 더 퍼시픽(이하 퍼시픽)’의 주인공이자, 실제 참전용사인 유진 슬레지(Eugene Sledge)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퍼시픽은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이하 BOB)’의 후속 작 격인 작품이다. BOB2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 참전한 군인들의 경험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 인기를 등에 업고 나온 퍼시픽이지만, 마냥 BOB를 따라가진 않았다. BOB가 전반적으로 전쟁에 대해 사실적인 묘사를 했음에도 한계는 있었다. 병사들 간의 전우애 같은,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장면 또한 많았다. 퍼시픽은 달랐다. 전우애 같은 표현이 없지는 않으나, 그 보다는 전쟁이라는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병사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묘사에 집중하였다. 이것이 퍼시픽이라는 작품을 BOB의 아류로 취급할 수 없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퍼시픽의 장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유진이다.

 

 


 

 

<퍼시픽의 주인공인 유진 슬레지의 실제 사진. 퍼시픽은 그가 남긴 수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유진은 미국 남부 앨라배마 주 출신이다. 작중에 하인 여럿이 있는 대저택에 거주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다. 어린 시절에는 남북 전쟁 때의 전장 터에서 총알을 파낸다거나, 그 시절의 전쟁을 재현하는 놀이를 하면서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전쟁에 대해 낭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걸로 묘사된다. 그에게는 심장질환이 있어 원래대로라면 징집에서 빠지게 될 터였다. 그럼에도 군대에 지원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면서, 옆 집 친구가 징집되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한다.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던 아버지는 그런 유진을 말리지만, 결국 아들의 고집 못 이겨 입대를 허락하게 된다. 군에 입대한 유진은 해병대에 소속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태평양 전쟁의 최전선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입대 전의 유진이 생각하던 전쟁은 낭만적이었다. 절대 악에 대항하는 영웅들의 활약. 고귀한 희생과 그에 감명 받은 이들의 분투 등. 하지만 입대 후에 마주친 현실은 참혹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대화하던 전우들이,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에 갈가리 찢겨나간다. 그렇게 전우들을 죽인 적들에게 복수를 해도 개운하지 않다. 자신이 쏜 총탄에 피 흘리는 일본군인의 모습에 내심 마음이 아프다. 그러다가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 드는 그들의 행동에 공포와 증오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

충격적인 일들을 겪으며 점차 심성이 망가져 가는 그였지만, 이때까지는 그럭저럭 견디고 있었다. 자신이 속한 부대의 대장인 할데인 대위의 격려 덕분이었다.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 해주며 유진의 심리에 공감해주는 그의 행동에, 유진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 할데인 대위가 적의 저격에 전사하면서, 유진은 결정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전까지는 적인 일본군에게도 동정심을 보이던 그가, “모든 쪽바리(jeps)를 죽여 버릴 겁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증오에 사로잡힌 것이다. 마지막 전장인 오키나와에서는 작업 중인 일본군 포로들을 대놓고 모욕할 정도로, 그는 뒤틀려 있었다.

그렇게 증오에 사로잡혀 있던 유진의 마음을 돌려놓는 사건이 일어난다. 숨어서 공격해오는 일본군들과 악전고투를 벌이며 전진하던 중, 그는 한 민가를 발견하게 된다. 안에 일본 군인이 숨어있을 것이라고 본 그는 본부에 포격을 요청한다. 곧 포격이 날아오고 민가는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무너진 민가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놀란 나머지 총을 겨누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할 말을 잃는다. 민가 안에 있던 이는 군인이 아니었다. 그저 전쟁을 피해 숨어있던 민간인이었고, 유진이 요청한 포격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었다. 고통에 못 이겨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는 그들을 보며, 유진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마침내 자신을 지배하던 증오에서 벗어난 것이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유진은 집에 돌아온다. 지옥 같은 전장에서 벗어난 그였지만, 그 영향에서도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었다. 전쟁의 기억으로 인해 밤마다 악몽을 꾸고, 삶에 대한 의욕도 잃어서 매일매일을 멍하니 보내야 했다. 아들의 기분을 풀어줄 생각으로, 아버지는 유진을 데리고 사냥을 나간다. 입대 전까지만 해도 사냥을 즐기던 유진이었다. 옛 실력을 발휘하여 멋들어지게 새 한 마리를 겨냥한 유진이었지만, 갑자기 총을 내려놓고 주저앉아 울기 시작한다. 도저히 쏘지 못하겠다며 우는 아들의 등을 아버지는 말없이 토닥여 준다. 군의관이었던 유진의 아버지는 많은 부상당한 군인들을 봐왔다. 군인들이 외상보다도 전쟁의 기억으로 인한 상처에 더욱 고통스러워하던 걸 봐온 그였기에 아들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드라마는 막을 내리지만, 전쟁의 고통스런 기억은 유진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flags of our fathers)`의 포스터. 퍼시픽과 마찬가지로 태평양 전쟁의 전장 중 하나인 이오지마 전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도 유진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기억으로 인해 평생 고통 받았다 한다.>

전쟁은 지옥이다.” “전쟁은 가장 승산이 있더라고 국가적 불행임에 틀림없다.” 유명한 군인들이 남긴 전쟁에 반대하는 명언들이다. 실제로 군인 중에 반전주의자가 많은 편이라고 한다. 의외일 수 있으나,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전쟁의 참상과 비인간성을 직접 경험했던 그들이기에 반전주의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설령 반전까지는 안가더라도, 최대한 신중한 자세를 보이게 된다. 과거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많은 미국의 장성들이 전쟁을 반대하거나 다시 고려해 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네오콘이라 불리는 정치가들의 강경한 태도와 이들에게 동의하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였다.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정치가와 민간인들이 오히려 전쟁에 적극적인 경우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군인들과 대비되는 정치가·민간인들의 호전성은 결국 경험의 부재에서 기인한다미디어에 묘사되는 전쟁은 대부분 그 잔혹함이 크게 줄어들어 있다. 설령 직접적으로 잔혹한 광경을 보여주더라도, 당사자들이 겪는 고통까지 느끼기는 힘들다. 퍼시픽과 같이 끈질기게 묘사를 해야 겨우 느낄까 말까이고, 그 조차도 직접적인 경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전쟁간의 거리는 너무 멀다. 모두가 전쟁을 겪길 바랄 순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그로 인해 쉽게 호전적이 되는 인류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유사 이래 전쟁과 인간과의 거리는 계속 멀어져 왔고,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을 대신해 적을 살상하는 드론 기술의 발달은, 병사들조차 유진과 같은 경험에서 멀어지도록 하고 있다. 마침내 모든 이들이 적을 보지 않고 죽일 수 있는 날이 오면, 모든 인류가 아무렇지도 않게 전쟁을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부디 그 전에 변화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by 고시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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