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시즌 1 방송 중 채근담을 다룬 적이 있다. 책 자체가 명언 모음집 정도였기에 내용에 대한 토론은 별로 없었다. 주로 인간성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던 중, 발제자로부터 현대 사회에 필요한 리더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평소 나는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상당히 고민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유비라고. 직후 그 이유에 대해서 간략히 덧붙였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마음속에 담고 있던 생각에 비하면 너무 단순하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 글을 써보고자 한다. 왜 역사속의 하고 많은 리더들 중에 유비를 이상적이라 했는지 말이다.
유비. 자는 현덕. 의제인 관우·장비와 더불어, 삼국지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본 이름일 터이다. 그가 삼국지라는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인물로써의 그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그를 ‘눈물로 나라를 얻어낸 인물’이라고 한다. 실력이 아닌 눈물로 부하들의 동정을 얻어내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다. 다른 누군가는 그 점이야말로 그가 영웅인 증거라고 한다. 힘으로 누르지 않고도 부하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오히려 더 대단한 게 아니냐는 의미다. 삼국지를 잘 모르는 사람부터 매니아에 이르기까지, 유비만큼 평가가 갈리는 인물은 없는 듯하다. 다만 이 글에서는 순전히 유비의 리더로써의 자질에 대해서만 얘기해보고자 한다.
<유비의 초상. 실제 유비는 수염이 거의 없었다 한다. (출처:위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그의 저서인 ‘소명으로써의 정치’에서 리더가 가지는 정당성의 원천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혈연이나 관습으로부터 오는 전통적 정당성, 법이나 제도로부터 오는 합리적 정당성, 지도자 자신의 매력으로부터 오는 카리스마적 정당성이 그것이다. 그는 이 중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카리스마적 정당성을 꼽았는데, ‘머신’을 통제하는데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머신은 좁은 의미로는 미국 정당제 하의 하부조직을 말하지만, 리더의 수족인 부하들 일체를 일컫는 말이라 봐야 할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결국은 사람이다. 홀로 모든 일을 다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능력 있는 부하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능력만으로는 안 된다. 그 능력으로 부정부패를 저지르거나 배신을 한다면 없느니만 못하다. 따라서 능력 있는 인재를 알아보는 눈과 그 인재가 딴 짓을 못하게 하는 통제력이 필요하다고 봐야한다. 전자는 둘째 치더라도, 후자를 위해서는 결국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관습이나 제도에 휘둘리지 않을 확률이 높다. “내 방식으로 해보니 더 잘되는데 뭐 하러 기존 방식에 집착하나?”라는 식으로 생각할거니까. 카리스마 즉 매력은 그렇지 않다.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이들이 대가를 바라고 열광하는 게 아닐 터이다. 매력은 그 자체로 사람을 움직인다.
유비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의제인 두 사람은 제외하더라도, 조운이나 제갈량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죽을 때까지 그를 따랐다. 다른 더 강한 군웅들에게 갔다면 손쉽게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경우에는 더하다. 유비가 아직 유랑하던 시절,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그를 반겼다는 기록이 수도 없이 나온다. 그 정도가 지나쳐서 그 지역의 군웅들이 그를 경계하기도 했다 한다. 백성들이 금방이라도 유비를 따라나설 기세라, 민심의 이반을 걱정했던 것이다. 이 모든 기록들이 진나라의 역사서인 삼국지 정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상식적으로 자국의 시조(조조)에게 적대했던 이에게 유리한 기술을 할 이유가 없을 터이다.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사진. 그는 사회 일반의 통념과 달리,
오히려 민주사회일수록 카리스마적 리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출처:위키)>
다만 매력만으로는 유비를 가장 이상적인 리더로 꼽기엔 부족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그 정도의 업적을 이룬 이들한테는 매력적이었다는 수사가 항상 따라다닌다. 당장 그의 선조인 한고조 유방부터가 그러하다. 날건달시절부터 그를 따르는 인물들이 끊임없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매력이 뛰어난 리더의 충분조건은 될지언정, 개중 가장 훌륭한 인물의 충분조건이 되기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유비의 어떤 점이 그를 가장 이상적인 리더로 꼽게 한 걸까? 바로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버리지 않는 태도다.
가정을 하나 해보자. 당신은 지금 수십만 명의 정예 병사들에게 쫒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수십만 명의 민간인들이 당신을 따르려 한다. 제발 자신들을 버리고 가지 말라고, 함께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십중팔구는 그들을 놔두고 도망쳐서 살길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유비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 위의 가정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유비는 조조의 군대를 두려워해 달아나려던 백성들을 버리지 않았고, 그 결과 장판파라는 지역에서 따라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위해 죽음마저 불사한, 차라리 기행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여기서 문제. 왜 백성들은 조조의 군대를 피해 달아나려 한 것일까? 답은 그간 조조가 저지른 행동에 있다. 조조는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배신하는 행위를 여러 번 저질렀다. 기록에는 조조가 자국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사례가 여러 번 등장한다. 농업이 주를 이루던 시대에 자신의 땅을 버리게 한 셈이니, 얼마나 원망이 컸을지 짐작가능하다. 비단 백성들만이 아니다. 창업공신이자 가장 신뢰하던 신하인 순욱조차도, 자신의 왕 즉위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좌천시켜버렸다. 유비가 신하인 황권이 위나라에 항복했을 때, 가족들을 처벌하자는 부하들의 의견을 각하한 것과 대비되는 장면이다. 이런 조조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민심을 잃게 만들었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가혹한 법률을 만들어야만 했다.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 사마천이 자신의 저서인 ‘사기’에서 한 말이다. 사람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집단은 오래갈 수 없다.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는 버려질 수 있다는 생각에, 구성원들이 딴마음을 먹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조는 죽을 때까지 잦은 암살과 배반시도에 시달려야만 했다. 조조의 후손 대에 군주의 힘이 약해지자, 그의 부하였던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에게 제위를 빼앗기게 된다. 반면 유비는 암살시도는 물론이고 배반도 거의 당하지 않았다. 그의 사람의 마음을 모으는 능력은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제갈량은 마음만 먹으면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음에도 최후까지 옛 주군의 숙원을 이루려 노력했다. 황권의 아들인 황승은 나라가 멸망하던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싸우다 전사한다. 한 집단의 리더로써 유비가 가진 진정한 힘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매력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 사기 중 자객열전 부분에 그의 말을 뒷받침해주는 인물들이 다수 나온다.
자신을 인정해준 주군의 복수를 갚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자객이 된 인물들이다. (출처:위키)>
삼국시대는 야만의 시대였다. 기존의 질서가 붕괴한 자리에, 남은 건 힘의 논리뿐이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태연히 헤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정의인 것이다.”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은 부귀영화를 누렸다. 비단 조조만이 아닌, 이 시대의 군웅들 대다수가 그런 식으로 힘을 얻은 이들이었다. 유일하게 반대로 행동한 이가 유비였다. 돗자리를 팔며 생활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유비는 말이 황손이지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기반이 약했고, 그 결과 제갈량을 만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떠돌거나 쫓겨 다녀야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유비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리더라도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 행동한다면, 자신의 집단은 물론 사회에까지 해를 끼치게 된다. 리더로써의 유비를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by 고시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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