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짐을 져라.
평화의 야만적인 전쟁,
기근의 입을 채워주고
역병이 끝나도록 명하라.
그리하여 너희 꿈이 가까워질 때
타인을 위한 목표도 이뤄질 지니,
너희의 모든 희망을 없애버릴
나태와 이방인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라.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백인의 의무 중’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부처님의 환생이 아닌 이상 있을 거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싫어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의가 없다. 자기만 안다. 막말을 한다 등등. 아마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대다수는 타당한 이유라고 인정하리라. 그런데 혹시 다음과 같은 이유는 아닌가. 나와 다른 성별이다. 나와 다른 인종이다. 나와 다른 성적 취향이다 등등. 아니길 빈다. 이들은 하나의 특정한 정체성에 대한 미움으로, 보통은 ‘혐오’라 하여 비판받는 이유들이니까. 일부 국가들에서는 ‘차별금지법’이라 하여, 위반 시 처벌을 할 정도로 강하게 제제하기도 한다. 즉 혐오는 미움에 대한 타당한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혐오를 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자신들의 미움에는 이유가 있다고.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의가 없다. 자기만 안다. 막말을 한다 등등. 그저 그 앞에 특정 정체성이 붙어있을 뿐. 어불성설이다. 사람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카레가 당근·감자·양파·쇠고기 등의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듯이, 성별·직업·취향·국적 등 여러 정체성들이 혼합된 존재이다. 몇 사람이 개중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한다고 하여 그들이 서로 같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카레와 감자탕에 공통적으로 감자가 들어간다고 하여 같은 요리가 되지는 않듯이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런 어불성설이 통한다. 일본인들은 의뭉스러운 사람들이다 -> A는 일본인이다 -> 그러므로 A는 의뭉스런 사람이다 식의 논리가 통용된다. 그를 규정하는데 한 가지의 정체성만이 작용하고, 환경이나 경험 등이 만들어내는 차이점들은 철저히 무시당한다.
개인의 차원에서 그친다면 괜찮다. 대부분의 혐오는 사회의 통념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나 개인의 얕은 경험이 초래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살면서 한 번쯤은 자신의 무지와 반대되는 사례들을 보게 된다.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이 편견을 가졌음을 깨닫고 반성한다면, 혐오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문제는 그것이 국가나 사회 등의 집단에서 통용될 때이다.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자신의 생각이 혐오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렬히 믿게 된다. 영향력 또한 급격히 커져버린다. 개인의 경우는 심해도 혐오범죄정도로 끝나지만, 집단의 혐오는 다른 집단에 대한 기피·배척- 심지어는 전쟁까지 일으킬 수 있다. 그만큼 강력하기에, 집단적 혐오는 종종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써 조장되곤 한다. 만화 ‘왕도의 개’에서 그려지는 청일전쟁의 양상도 그런 식으로 전개된다.
(이하는 작품에 묘사된 내용이지, 역사의 정설은 아니다. 글의 주제를 뒷받침하는 사례로써 제시한 것이니, 오해하진 말아주셨음 한다.)
<청일전쟁 당시 청군과 교전 중이던 일본 육군의 사진.
혹자는 동학농민군을 합쳐 동아시아 삼국 간의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출처:위키피디아)>
왕도의 개는 청일전쟁 직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만화이다. 작가인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일본 최북단인 홋카이도 지역 출신인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왕도의 개의 이야기는 홋카이도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카노는 정치범으로, 홋카이도에서 노역을 하고 있었다. 가혹한 환경을 견디다 못해 탈출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원주민인 아이누족의 도움을 받게 된다. 몸을 숨기기 위해 아이누족으로 위장하게 된 주인공은, 본토의 일본인들이 그들에게 행하던 수탈을 직접 보게 된다. 아이누인들이 가져온 모피나 기타 산물들에 대해 일본 상인들은 일부러 흠을 잡아 싼값에 매입을 한다. 그렇게 제 값을 받지 못해 생계가 곤란해진 아이누인들은 빚을 지게 되고, 그 대가로 자식들을 팔아넘기게 되는 식이다. 이러한 참상을 보면서, 카노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된다.
<작가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모습. 같은 세대인 토미노 요시유키, 미야자키 하야오와 마찬가지로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보인다.
일본인들에게 최고의 시대로 기억되는 메이지 덴노의 시대를 비판한 본 작품이 이를 잘 보여준다. (출처:위키피디아)>
그렇게 동분서주 하던 중, 카노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김옥균.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잘 알려진 그 사람이다.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에 피난 왔던 그는 보호라는 이름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고, 사람이 적어 감시가 수월했던 홋카이도로 옮겨졌던 것이었다. 김옥균을 만난 카노는 곧 그의 사상에 매료된다. 대아시아주의. 서구열강의 침략에 맞서 한중일이 단결해야한다는 주장으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사상이다. 훗날 일본이 다른 민족들을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대동아공영’으로 타락하게 되지만, 이때까지는 삼국간의 평등한 연대를 주장하고 있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행태에 분개하던 카노였기에, 그와 대비되는 대아시아주의에 쉽게 공감할 수 있던 셈이다. 이후 카노는 김옥균의 제자이자 경호원으로써 그를 따라다니게 된다.
<교과서로 익숙한 김옥균의 사진. 혹자는 그를 비운의 혁명가라 하고, 다른이는 기회주의자라 한다.
김옥균만큼 평가가 갈리는 인물도 드물거다. (출처:위키피디아)>
이런 대아시아주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일본 정부의 관료들과 그에 동조하는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이 하루 빨리 서구 열강의 대열에 합류해 다른 민족·국가들을 수탈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연습 상대로써, 쇠락해가던 청나라와 조선은 가장 이상적인 대상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침략을 하고 싶었으나, 명분이 없었다. 거기에 대아시아주의에 공감하는 여론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관료들은 이윽고 한 가지 묘안을 내게 된다. 김옥균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었다. 한 번 실패했음에도 김옥균은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있었다. 청나라의 실권자이자 조선 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홍장을 만나 대아시아주의를 설파하려 했던 것이었다. 이 사실을 눈치 챈 일본 정부는 이홍장과 거래를 한다. 역적 김옥균을 조선에 넘김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공고히 할 속셈에, 이홍장은 거래를 승낙한다. 결국 카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김옥균은 홍종우의 손에 암살당하고, 이홍장의 묵인 하에 조선으로 시신이 양도되게 된다.
<청일전쟁의 주역인 무쓰 무네미쓰의 사진.
작중에서 그는 제국주의를 향한 일본의 모든 행보를 막후 조정한 인물로 등장한다. (출처:위키피디아)>
이후 김옥균의 시신은 찢겨 저서 거리에 내걸리게 된다. 이 광경을 본 일본인들은 분개하였다. 조선인들은 야만적인 이들이고, 미개한 그들과의 연대 같은 건 불가능 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게 된다. 결국 대아시아주의는 쇠퇴하고, 미개한 조선과 청을 문명국가인 일본이 지배해야 한다는, 제국주의가 대세가 되고 만다. 일본 관료들은 손 안대고 코푼 셈이었다. 이후에는 익히 아는 대로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의 의뢰를 받은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하고, 이를 구실로 일본 정부 또한 군대를 보내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카노는 관료들을 암살하려 하는 등 최선을 다 하지만,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다. 조선에 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하여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 일본의 모습을 끝으로 왕도의 개는 막을 내린다.
<작중에 등장하는 전봉준의 모습. 비록 이번 주제와는 다르기에 넣지 못했지만,
그와 주인공 카노와의 대담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읽을 때 주의해서 봐주셨음 한다. (출처:위키)>
“정치적 판단을 할 때 열정이 개입하면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한 말이다. 사실 이 말은 그 자신의 경험에서 나왔다. 1차 세계대전 직전, 그는 다른 반전주의자들과 함께 참전 반대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나자마자 상황이 돌변했다. 러셀을 포함해서,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조국의 승전을 바랐던 것이다. 러셀 자신은 금방 그 열기에서 벗어났으나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했고, 영국은 전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러셀같은 석학조차도 순간 휩쓸릴 정도로 대중의 열정은 쉽게 전파된다. 그 원동력이 억압에 대한 분노와 같은 긍정적인 것이든, 타자에 대한 혐오와 같은 부정적인 것이든 말이다. 청일전쟁의 경우와 같이, 그 열정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도구가 되어 전쟁이라는 파멸을 불러오게 된다. 이후 일본제국의 운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피해는 상대방뿐만이 아닌 휩쓸려 버린 대중들 또한 지게 된다. 이 악순환에서 이득을 보는 건 오직 혐오를 사주한 누군가뿐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전쟁과 학살들이 특정 정체성에 대한 미움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슬라브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미움으로 학살·전쟁을 한 히틀러와 나치, 지식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미움으로 학살을 한 크메르 루즈 등이다. 그로 인해 셀 수도 없는 이들이 죽었고, 살아난 이들도 그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범죄로 여기는 사회가 많아졌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하다. 여전히 많은 국가에서 다른 집단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이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으니까. 다른 이를 미워할 순 있다. 노여움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미움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이유가 특정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성립 되어서는 안 된다. 집단도 결국에는 개인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나 하나부터 바뀌어야 세상 또한 바꿀 수 있다. -by 고시낭인
'또 다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란] 책 추천_눈 먼 자들의 도시 (0) | 2016.02.17 |
---|---|
[코이의 시시각각] 02. ‘일자리와 경제민주화’ 대국민 약속 지켜야 (0) | 2016.02.17 |
우리가 전쟁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 1.전장까지의 거리 (0) | 2016.02.17 |
우리가 전쟁을 그만둘 수 있을까? -프롤로그 (카드뉴스) (0) | 2016.02.17 |
나의 이상적 리더상- 유비 (관련도서- 삼국지) (3) | 2016.02.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