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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끝난 뒤

[분노의 포도] 믿음에 관하여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7. 3. 26.

안녕하세요 중년백수입니다.

책이랑 톡톡 65화는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를 읽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이번 뒤풀이에서는 방송에서도 다루었지만 다소 미흡했던 ‘1930년 대공황이 인류 역사에 남긴 의의’와 소설의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믿음’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방송에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소설 속의 다채로운 캐릭터들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

농장주들은 오렌지를 땅에 묻거나 석유를 뿌려 썩히느라 골치를 앓았다. 그 때 농장 밖에서는 영양 실조에 걸린 사람들이 오렌지를 훔치다 경비원의 총에 맞기도 하였다. 1929년 대공황이 덮친 미국의 농장에서 실제 벌어진 광경이었다. 이제 세계는 케인스의 말대로 자본주의의 틀을 바꾸어야만 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 휴머니스트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을 기점으로 세계를 뒤흔든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라고 보통 말합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만 아주 정확한 말도 아닙니다. 대공황이 무슨 교통사고도 아닌 이상 어느 한 기점을 특정하여 이때부터다 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대공황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넘쳐나는 공급을 수요가 감당하지 못했다거나 자유시장경제의 실패라거나 주장하지만 그 어떤 것도 확실치는 않습니다. 오히려 국가의 과도한 개입이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워낙 다양한 원인들이 뒤섞여 발발한 일이니 하나의 명백한 원인을 특정해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그것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대공황의 참담함을 가장 잘 나타내는 통계는 당시의 실업률입니다. 미국의 경우 실업률은 1929년 3% 수준이었던 것이 공황의 수렁이 깊었던 1933년에는 25%에 이르고, 농업부문을 제외한 실업률은 무려 37%에 이릅니다.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이 세 명 가운데 한 명이었으니 그 경제적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참한 지경이었습니다.

 ‘분노의 포도’는 대공황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분노의 포도’는 소설의 도입부에 나오는 거북이가 갑자기 눈앞에 알 수 없는 높은 존재가 나타난다든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부딪혀 몸이 뒤집히는 것처럼 자신들이 어찌할 수도 없고, 도무지 뭔지도 모르는 것들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뽑혀나가 신음하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방송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소설 속에서는 조드 일가나 윌슨 부부, 혹은 트럭 운전수들로 대표되는 ‘협력과 공생’이라는 믿음과 트랙터 운전수나 대지주, 은행, 일부 노동자 등으로 대표되는 ‘경쟁과 각자도생’이라는 믿음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는 ‘협력과 공생’으로 대표되는 조드 일가를 통해 ‘사랑’이라는 믿음만이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암시로 소설을 끝마칩니다. 그렇다면 과연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대공황은 어떤 식으로 극복되었을까요?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대공황은 경제,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에 이르기까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국에서는 루스벨트가 당선되고 뉴딜 정책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하나 그렇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 했습니다. 민주주의는 갈수록 침체되고 민족주의는 다시 기승을 부리며 정치적 극단주의가 스페인 내전을 불러일으키고 종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이 2차 세계대전이 미국을 대공황의 수렁으로부터 끌어올리게 됩니다. 물론 2차 세계대전이 대공황을 해결했느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합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대공황이 막을 내린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미국인들에게 좋은 것이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쟁은 그야말로 인간이 일으킬 수 있는 소용돌이 중 가장 거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아비규환 속에서는 많은 것들이 뭉뚱그려지고 부지불식간에 사라져 갑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일 뿐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미국인들에게는 좋은 일이었을 것이고, 비참하게 죽어간 미국인들에게는 끔찍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과 나서서 싸우는 사람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은행가들, 정치인들, 사업가들 그들이 전장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뭐 그래도 미국은 결국 대공황을 벗어났으니 그렇다고 칩시다. 세계의 상황은 어떨까요? 모두들 미국처럼 대공황에서 벗어났을까요? 아마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당시 제3세계 사람들의 눈을 보면 분노의 포도가 영글어 주렁주렁 매달리는 것을 넘어 시뻘건 포도즙이 마치 피눈물처럼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세계로 퍼진 분노의 포도는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디선가에서는 누구에게 분노를 표출해야 할지 몰라 분노한 자들끼리 치고 박는 내전, 혹은 단념으로 인해 눈먼 장님처럼 손끝으로 커피콩만을 더듬고 있는 아이들의 손으로 변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것은 저의 과대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대공황은 결코 인간에 대한 사랑을 통한 협력과 공생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조드 일가가 사랑, 협력, 공생을 대표하는 것도 어이가 뺨을 후려치는 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밝혀지듯이 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총, 칼을 동원한 무력으로 쫒아내고 그곳에 자리 잡은 미국인들입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누구나 강해지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 '아메리카 드림'의 가치를 쫓아 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드 일가는 오늘날을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그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저는 그것이 사랑을 통한 협력과 공생, 서로에 대한 믿음이라는 가치가 점점 쇠퇴해 가는 것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방송중에 많은 분들이 말씀하셨습니다. 조드 일가 너무 나이브한거 아냐? 좀 의심을 좀 해보라고 좀좀!! 하며 답답해들 하셨습니다. 물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선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답답함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대공황 당시 미국에는 그래도 아직은 조금이라도 그런 것들이 남아있었을 겁니다. 물건에 대한 정당한 값이 메겨지고, 노동에 대한 가치가 땅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땅과 땀은 정직하다’와 같은 가치들이 살아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드 일가처럼 별다른 의심없이 그저 정직한 마음으로 일이 있는 곳에 가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마음으로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었구요. 하지만 시대는 급변했습니다. 30달러는 족히 받아내야 응당 마땅할 물건이 상황에 따라 3달러에 넘어 갑니다. 노동의 가치는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만들어놓은 상황에서 나옵니다. 그 과정을 거쳐 인류는 21세기에 도착했습니다. 그런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눈에 조드 일가가 무지해보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작가는 왜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작품을 끝맺었을까요? 저는 이것을 ‘수동적 믿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게 될 즈음 저희 집에서는 제가 당연히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해서 남들처럼, 아니 어쩌면 남들보다 좀 더 나은, 보란 듯이 자랑스러운 아들로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셨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죄송하게도 그 믿음은 산산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저는 몇 가지 이유로 취직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결심을 어머니께 알려드렸을 때 어머니의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 무너져 내렸고 그 이후로 저와 어머니 사이에는 깊은 갈등의 골이 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석날,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와 며칠을 머물고 다시 올라가는 제 등 뒤에서 어머니는 제게 새로운 믿음을 넌지시 내비치셨습니다. “우리 아들은 알아서 잘 할꺼시여. 엄마는 우리 아들을 믿으니까.” 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신뢰가 아니라 포기라는 두 글자가 적혀있었습니다. “믿음직 스러워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거 외에 다른 방법이 없으니 제발 알아서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소망에서 믿는거 아니쇼?”라는 저의 농담에 “오메 니는 어째 내 맘을 그렇게 잘 안다냐”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니. 이렇게 저렇게 싸워봐야 아들이 결국 알아서 본인 마음대로 살아가니 다 큰 아들을 상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고, 그저 뭐든 잘 됬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믿음의 자리를 메꾸신 겁니다. 앞서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해서 남들처럼 살 것이라는 믿음이 어머니 스스로 한 능동적 믿음이라면, 후자의 믿음은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때, 그저 그렇게 되기를 믿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게 없을 때 나오는 수동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존 스타인벡이 결말 부분에서 내비친 인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그러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서로 협력하며 공생해 갈꺼야!’라는 능동적인 믿음이 아니라. ‘부디 인간이 서로 사랑해서 협력하며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거 이외에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라는 수동적 믿음 말이죠.

 이에 관해 더 말하면 한숨만 나올 것 같으니 이쯤에서 ‘믿음’을 주제로 한 ‘분노의 포도’ 뒤풀이를 마치겠습니다. 이제 정말 다채로웠던 소설 속 캐릭터들을 다뤄봐야 할 텐데요. 언제나 그렇듯이 끈기 부족으로 2부에서 계속됩니다~ 라는 핑계를 대며 언제가 될지 모르는 2부를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ㅜㅜ 아니.. 어쩌면 2부는 여러분들께서 직접 읽어보시고 각자의 마음속에 써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2부는 언젠가 꼭!!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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