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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아 사람아] 저당 잡힌 삶과 그렇지 않은 삶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7. 3. 18.

안녕하세요, 희조입니다.
64화 잘 들으셨나요?
오늘은 제가 예전에 학교 과제로 적었던 [사람아 아 사람아] 서평을 올립니다.
자꾸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드러내어 민망합니다만 다시 읽어도 비슷한 감상이 들었던지라 이것으로 갈음합니다. 새로 쓰기 귀찮았던 것이 절대 아니에요.



 1. 나의 대학 생활을 돌아보며

 요즘 포럼(학생들이 직접 강연하고 토론을 진행하는 방식의 행사)이라는 것에 참가하고 있다. 솔직히 (선배들이) 한다기에, 해야되는거라, 참가했다. (내가 맡은) 조장의 역할은 조원들이 일어났는지 아침마다 확인하고 아닐 경우 그들을 깨우고, 참가를 독려하고, 토론을 독려하고, 뒤풀이를 독려하고 그런 것들이다. 내용이 좋다고 믿는다면 권유와 설득과 친목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겠지. 그렇지만 나는 싫은 이유들이 더 많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내가 매달리는 것 같은 기분. 궁금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생각을 물어볼 때 스스로에게 느끼는 가식.진짜 궁금하면 오겠지.  올라면 말아!” 하고 싶다. 실제로 열심히 하지도 않고 있다.

  (친구들에게 포럼 참가를) 제안하고 싶은 이유가 명확하지 않아서, 항상 괴롭다. 그보다 내가 하는 이유가 스스로 명확하지 않아서 이런 고민들로 나를 괴롭히는 중이다.

 우리가 뭐라고 라는 생각을 많이 하곤 한다.잘 알지도 못하면서! 또는 그거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잖노 하고 딴지걸고 싶을 때가 많다. 오고가는 토론들에서 오는 무기력함과 졸음. 저렇게 완벽하게 말하고 나면 뭐가 남을까. 공론장은 무슨. 가식과 위선이 판치는데! 같은 나 자신한테 하는 생각들. 오늘은 일베 얘기가 나왔는데 전혀 화가 안 나고 방어막을 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모났다.(후략) 

- 2013.08.29 다이어리

 
 지금까지의 나의 대학생활은 꽤 공동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소한 술자리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큰 자리가 익숙하고, 친구들끼리 추억을 쌓을 궁리를 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과 우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대강 학생사회, 공동체, 권리, 소수자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 얘기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우리라고 일컫을 수 있게 된 일부 학생 집단, 주로 학생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학생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직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우리들이 이루어 낸 것도 적지 않다. 등록금 인상을 저지했다거나 기숙사를 새로 지어냈다거나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렸다거나 하는 것이 그것이고 폭력적인 술문화에서 소외감을 느꼈던 학생들에게 소소한 위안을 줬다거나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왜 작년 여름의 나는, 저 일기 속의 나는 행복하지 못했을까? 많은 학생들 앞에서 우리가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하는 자리가 왜 나한테는 가식이고 위선이고 괴롭게 느껴졌을까? 중국 문학의 기수 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를 읽고 있자니 작가의 고민이 내게 기수처럼 꽂혔다.

 

2. 아무런 노력도 없이 공산주의의 전사가 되었다.
 
너는 무엇을 보았는가? 네가 신봉해 왔던 것은 무너져 버렸는가? 추구해 온 것은 환상으로 사라져 버렸는가? 아아, . 난 정말로 무서워.(234

 교리의 권위가 추락할 때 사회에 큰 혼란이 온다. 이는 역으로 신념은 사람들을 하나로 결집시켜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동력이 되기도 함을 뜻한다. 그렇기에 신념은 그만큼 강력하고 굳세서 쉽게 반증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신념은 그 자체의 힘을 충분히 빌리지 못하는 경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의식화 과정을 통해 계승되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신념에 대한 신뢰를 쌓게 된다.

 아직도 그러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대학은 아직도 의식화의 장으로 기능하곤 한다. 사회비판적인 사회과학대학의 특성상,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하다. 선배들은 갓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학교 생활의 노하우를 가르쳐 준답시고 접근해서는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갑자기 대학이 무엇이고 대학생은 어떤 존재이고 우리학교 총장님은 왜 매번 잘못된 선택을 하는지 말해주곤 한다. 신입생들은 그러한 똑똑한선배들을 보며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 우리 학교는 나빠., 대학생은 사회에 참여해야지.와 같은 생각들이 어느새 내 사고의 주요한 흐름을 지배하게 된다. 그들은 나의 준거집단이 되고 나는 그 속에서 안락함을 느낀다. 나는 집단의 의견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마치 나침반이 향하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배와 같다. 나는 그런 신입생 중 하나였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공산주의의 전사가 되었다(236)고 말하는 허징후를 보면서 나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장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사실이다. 적어도 쑨위에나 허징후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책들을 읽고 그 구절을 인용할 줄도 알지만, 나는 그러지도 못한다. 나는 책을 읽은 기억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홍세화, 유시민, 강준만 등이 쓴 모호하게 진보적인 비평서들을 읽은 정도다. 그 외에 말들은 모두 선배들에게서 나왔거나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많은 회의를 느끼곤 한다. 이것이 진정 내 주체적인 생각인가?, 나는 선배들의 말을 따라하는 앵무새인가?” “왜 주위에 휩쓸리는 나를 내버려 두었지?와 같은 생각들이 스치면서 지금까지 내가 했던 활동들에 회의를 느낀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내가 챙겨야 될 후배들과 책임져야 될 역할들이 눈 앞에 있음을 직감하면서 그런 회의감은 곧 사치가 된다. 대신, 내가 학생 공동체를 사랑하고 지켜내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든 찾아내어 그것들을 끊임없이 되새김질 하는 것이 일시적이지만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3. 중화 인민들의 모습에서 본 학생 사회

 책에 등장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들도 마찬가지이다
. 공산주의를 표방한 중국에서 공산당의 임무는 인민들을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계급성을 끊임없이 드러내게 하고 계급투쟁의 깃발을 스스로 달게 하여 혁명 완수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자 최상의 목표이다. 그런 당의 계획 아래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은 계급해방의 주체로서, 역사의 주인으로서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특히나 지식인이라면 더 할 나위가 없다. 인민들을 이끌어 가야 할 지도자는 더욱 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런 사회 속에서 내가 당당한 주체로 존재할 수 있나?는 질문을 가져서 될 리가 없다. 당당하지 않다는 것은 사회를 변혁할 인민으로서, 인민들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념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것의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금기시되는 질문을 용감하게 던졌던 이 책은 작가의 깊은 고뇌와 괴로움의 발현이리라. 작가는 책에서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이라는 책으로 대변되는 허징후의 철학을 중심으로 자신의 고민을 풀어나가되 다양한 인물들을 출현시켜 배타적인 중국 사회가 만들어 낸 여러 인물 유형의 상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학생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유형들이기도 하였기에 공감하기가 참으로 수월했다.

  먼저 씨리우와 같은 인물은 당의 전체주의적인 분위기를 재생산하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자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아들 씨왕 앞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정수만 진지하게 학습하고 지키면 된다(103)고 역설하는 씨리우는 당의 교조적인 분위기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백가쟁명이라는 기조를 장려했던 중국이 정작 다양한 논의의 발화를 허용하지 않은 것은 이런 주류 보수적 계파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인민들을 계속 재단하며 인민의 무지함과 방종함을 비난하기 바쁘다. 학생 운동 판의 주류도 다분히 이런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학생 사회에 무관심하거나 학생회 체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우리와 다른, 열등한 사람들로 치부한다. 우리의 잣대로 멋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사람 한 명 한 명의 커리어를 멋대로 예측한다. 그리고 그것을 정치라는 이름으로, 조직활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요루어쉐이나 쳔위리는 그 주류에 타협하는 기회주의적 인물로 잘 드러난다. 그들은 씨리우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각종 수단을 다 해서 그에 기생한다. 이런 중국 정치의 타락한 모습은 쉬허엉종은 정치 투쟁에서의 옳고 그름은 기회 여하에 달려 있을 뿐이며 그 사람의 성실성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168)의 말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권력을 쫓는 이런 사람들은 학생 사회에도 역시나 존재한다.

  리이닝과 같은 인물은 당에서 점점 멀어지는 일반 인민들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풍파도 없지만 재미도 멋도 없는 생활에 안주할 줄 알고 실현성이 없는 꿈은 꾸지 않기도 작정(36)한 리이닝은 인민으로서의 타이틀을 버리지는 않지만 본래 인민으로서 가져야 할 주체성은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우츈은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그런 인민들을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배타적인 공산당 본인이다. 인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당리당략에 치우쳐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고 인간의 가정을 파괴(129)하는 공산당의 행보가 그 원인이다. 이러한 리이닝 혹은 우츈과 같은 인물은 학생 사회에서 일반 대중에게 배타적인 학생 운동 세력에 염증을 느끼고 점점 멀어지는 학생들의 모습과 겹쳐지기도 한다. 작가가 쑨위에의 친구들로 그런 인물들을 배치한 것은 쑨위에가 바로 그러한 혁명당의 모순을 절실히 실감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배치와 더불어 인물의 성격이 돋보이는 것은 이 책의 독특한 전개 방식 덕분이다. 여러 등장인물의 등장과 그들 각각이 자신의 내면을 직접 드러내게 한 1인칭 서술기법은 작가가 인물 개인의 내면에 주목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끔은 그 속마음을 너무 직접적으로 노출시켜 노골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적당한 주기로 화자가 계속 변하기 때문에 나같은 독자를 애태우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또한, 1인칭 시점을 사용한 것에서 모자라 편지라는 서정적이고 사적인(private) 매체를 여러 번 삽입하여 작가만의 여성적인 문체가 돋보인 것이 인상적이다. 이런 형식적 미학들은 모여모여 인물 개인의 내면을 통해 인간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이 책의 주제를 아주 잘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그러한 자세한 내면 묘사와는 달리 자오젼후안은 작가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음을 주지하고 싶다. 정조를 지키지 못하고 쑨위에의 곁을 떠난 자오젼후안은 언뜻 배신자의 이미지로 낙인을 찍히기도 하지만 사실은 쑨위에의 잘못을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체주의적인 요소를 가진 집단일수록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사생활을 부차적인 영역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혁명 완수라는 목적을 가진 공산당이라면, 학생 사회 건설과 사회 변혁이라는 목적을 가진 학생 운동 단체라면 그런 경향이 자연히 짙기 마련이다. 개인의 행복보다는 집단의 영속을 중요시 여기는, 같은 목표를 향해 걸어 나가는 동지들이 가족보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바로 그러한 집단에 쑨위에가 속해 있었다. 그녀 또한 자오젼후안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정신에 있어서는 나 자신에게 충실했다(464)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쑨위에와 자오의 이혼을 과연 기다림을 못 견딘 자오의 탓으로 온전히 돌릴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는 학생 운동 단체 또한 내부 활동가들의 행복은 보장하기는 커녕 희생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자오젼후안은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4. 낙관적이면서도 비관적인. 비관적이면서도 낙관적인.

 끝으로 이 책이 주는 묘한 여운은 작가의 낙관적이면서도 비관적인 전망에 있다
. 소설 속 청년 세대를 대표하는 씨왕과 쑨한은 기성 세대의 한계를 넘어설 젊고 유식한 엘리트로, 당의 과오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상징으로 묘사되곤 한다쑨한이 허징후에 대한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시한 것은 결국 쑨위에가 허징후를 택한 사실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씨왕 또한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바로 그 씨리우의 아들로서 장래 중국을 이끌어나갈 적극적인 대안으로 기능하는 듯 보인다. 마치 내가 1학년 때 선배들한테 간간히 던졌던 객기어린 모습들과 겹쳐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과 왜 소통하려고 하지 않느냐?, 왜 같은 가치를 이야기하는 다른 학내 단체와 연대하려고 하지 않느냐?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이 있다고 그러냐? 나는 열이 받쳐 이런 질문들을 던졌었더랬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선배들이 으레 그래. 너 나이면 그런 고민들을 할 때지.,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거야.라며 내 말을 어물쩡 피해버리곤 했던 것처럼 소설 속 인물들도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데 그친다. 가자. 젊은이들 속으로. 이 흐트러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발산시키자.(165)며 허징후는 그들의 총명함과 생기를 되찾고 싶어하지만 결국에는 우리들도 다시 그들(젊은이들)처럼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이 우리들처럼 되는 것일까.라는 체념섞인 속내 내비친다. 이는 마치 젊은이들도 시간이 흐르면 자신들처럼 생기를 잃을 것이라는 복선을 남기는 것처럼 보여진다. 쑨위에가 허징후를 택한 결말도 내 고민에 명쾌한 해결책을 주지는 못한다. 둘의 결합은 서로의 자아를 되찾고 함께 나아간다는 행복한 결말이면서도 앞으로의 일에는 흐릿한 전망을 내비추기 때문이다. 어떻게 될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허징후의 출판은 아마 불허될 것임을, 쑨위에는 앞으로도 당에서 험한 눈초리를 받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의 조국에 대한 이러한 애매한 태도는 어쩌면 당의 비판을 모면하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나는 이 책에서 큰 위안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작년의 고민을 되새기면서 다시 한 번 내 삶에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당에 저당 잡히지 않는 인민의 삶, 집단의 목표를 공유하면서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 그것은 앞으로의 나의 인생에서도 거대한 화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출처: 다이허우잉 저. 신영복 역. "사람아 아 사람아". 다섯수레.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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