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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끝난 뒤

[설계자들] 설계자들 뒤풀이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7. 1. 15.

 안녕하세요 중년백수 입니다.

 이번 주에는 저의 발제로 김언수 작가의 소설 '설계자들'을 읽고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발제자부터 개념의 혼선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방송중에 토론자들끼리도 약간의 혼선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날카로운 귀를 지닌 청취자 여러분들께서 각자 비판적으로 잘 들어주셨으리라 믿습니다. 하하...

 설계자들에서 제가 구분하고자 했던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설계가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였습니다. 이 두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만약 후천적으로 설계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바뀔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설계된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설계된대로 살아 갈 뿐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에 따라 정 반대의 지향점이 도출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결정론이냐 환경론이냐 하는 문제로 환원될수도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인류가 어떻게 설계되었는가에 대한 세 가지 입장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소설 '설계자들'의 등장인물인 '너구리 영감' 입니다. 너구리 영감은 인류가 철저하게 선천적으로 설계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에는 어떤 선도, 악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가장 오래된 인류의 두개골에는 창으로 찔린 자국이 있지. 창녀와 포주는 농부보다 훨씬 더 오래된 직업이고,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아들이 한 일도 살인이었지. 그 이후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오로지 전쟁을 통해서만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었지. 문명이건 예술이건 종교건 하다못해 평화도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이것이 인간이란 종이야. 인간이라는 종은 처음부터 서로를 끊임없이 죽이면서 살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거지. 살인자의 편에 기생하거나 아니면 상대편을 죽이거나. 그게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지. 인류는 그런 아포토시스로 지금까지 버텨왔던 거야. 그게 이 세계의 참모습이지.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고. 그것을 멈추는 방법을 아직 찾이 못했으니까."

 여기서 '아포토시스'란 '세포자살'을 일컫습니다. 세포 자살은 말 그대로 세포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 인데요. 세포가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는 자신이 죽는 것이 전체 개체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던져 전체를 살리는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것이죠.


인체 내에서 세포 자살이 일어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발생과 분화의 과정 중에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기 위해서 일어난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면서 꼬리가 없어지는 과정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람은 태아의 손이 발생할 때 몸통에서 주걱 모양으로 손이 먼저 나온 후에 손가락 위치가 아닌 나머지 부분의 세포들이 자살해서 우리가 보는 일반적인 손 모양을 만든다. 이들은 이미 죽음이 예정돼 있다고 해서 이런 과정을 PCD(programed cell death)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세포가 심각하게 훼손돼 암세포로 변할 가능성이 있을 때 전체 개체를 보호하기 위해 세포 자살이 일어난다. 즉 방사선, 화학약품, 바이러스 감염 등으로 유전자 변형이 일어나면 세포는 이를 감지하고 자신이 암세포로 변해 전체 개체에 피해를 입히기 전에 자살을 결정한다. 이때 아포토시스 과정에 문제가 있는 세포는 자살을 못하고 암세포로 변한다. 과학자들은 이와 같은 아포토시스와 암의 관계를 알게 되자 암세포의 세포 자살을 유발하는 물질을 이용해 항암제를 개발하려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 출처, 네이버 캐스트 '세포자살'


 개미집단을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개미 한마리 한마리를 각각의 개체로 생각하지만 곤충학자들에 의하면 개미는 스스로를 하나의 개체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미들은 개미집단 자체를 하나의 개체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개미나 병정개미들이 개미집단에 위기가 닥치면 망설임없이 목숨을 바쳐 집단과 여왕개미를 지킵니다. 개미 한마리 한마리는 그 한 마리라는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미집단'이라는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 입니다. 

 인간의 몸을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아주 당연하게 우리 한명 한명을 하나의 개체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 몸 속에는 수 억, 수 조개의 개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포 하나하나를 각각의 개체로 본다면 말이지요. 만약 우리 몸 안의 세포들이 스스로를 하나의 개체로 인식하고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몸에 상처가 나면 피를 멈추기 위해 상처 부위로 혈소판들이 몰려들고 그것이 딱지가 됩니다. 상처가 다 나으면 그 딱지는 제거되죠. 혈소판의 입장에서는 자살이라고 볼 수도 있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만약 혈소판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상처가 났는데도 몰려들지 않는다면 인간이라는 개체는 출혈과다로 죽게 될 것 입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아포토시스의 사례는 아닐 것 입니다. 하지만 집단을 위한 개체의 자살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구리 영감은 이런 '아포토시스'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 일까요? 아마도 인간이라는 개체와 인류라는 개체 사이에는 인간에게는 불행한 일이 인류라는 집단에는 유익한 일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입장에서는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건들이 인류의 입장에서는 인류의 생존, 혹은 발전에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죠(사실 아포토시스는 적확한 비유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인간들이 각자의 이득을 위해 서로를 죽이고 핍박하는 것은 집단개체를 위해 자살하는 세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니까요. 다만, 인간이라는 개체와 인류라는 집단개체의 관계를 묘사함에 있어서는 충분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집단과 그 집단을 구성하는 개체의 입장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또한, 인류라는 집단은 그것의 구성원인 인간의 총합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존재일수도 있다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중에 나왔던 [인간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류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명제는 한층 더 성립하기 어려줘 집니다(개인적으로는 인간이 그렇게 '폭 넓게'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다는 전제 조차도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능력보다는 인간이 처한 상황때문에 그런 것인데 후반부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인류문명을 발전시켜 온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고대의 대규모 운하는 여러 사람들의 협력으로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이끌려나온 노예들에 의해 지어진 것 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이로움을 선사하는 의학은 어떨까요? 모두 시체를 대상으로 한 연구로만 이루어졌을까요? 자본주의는 어떻습니까? 식민지 없이 그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평화로운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너구리 영감은 이 모든 것들이 딱히 호들갑 떨 일도 아니고,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며(인간의 입장에서 그렇게 보일 뿐), 그저 인류라는 집단이 그렇게 발전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뿐이라고 말합니다(그러면 쿨해보일 줄 알고?).  그러니까 의자 위에 누가 앉아서 이렇게 저렇게 인간들을 설계해서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는 애초에 그렇게 폭력을 통해 발전하게 설계되었고, 설계된대로 알아서 움직이고 있으므로 의자 위는 텅 비었다는 것이죠. 즉, 너구리 영감의 입장에서 인류는 선천적으로 설계된 것 입니다.

 두 번째 입장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않다. 지금까지는 인간이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인류를 발전시켜왔을지는 몰라도 우리는 조금씩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고 있다. 인간은 서로를 사랑하며 인류를 발전시킬 수 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죠. 그런 사람들은 너구리 영감의 말처럼 애초에 인류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어있다면 변화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 입니다. 그 사람들의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확실한 건 이 경우에는 너구리 영감과는 달리 후천적 설계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 입니다. 선천적 설계를 일정 부분 인정할수도 있고 완전히 부정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후천적 노력을 통해 인류의 발전 양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부분은 방송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졌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런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선천적 설계'와 '후천적 설계'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했고(선천적 설계에서는 의자가 텅 비어있어야 하지만 후천적 설계에는 분명 의자 위에 누군가 앉아 있어야 합니다), 요약해보자면 너구리 영감은 분명 선천적 설계를 주장하고 있으며 소설의 곳곳에 등장하는 후천적 설계의 흔적들은 결국 선천적으로 설계된 것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들이라게 저의 해석입니다.

 세 번째는 저의 생각입니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인류가 어떻게 설계되었는가에 주안점을 둡니다. 하지만 인류는 그 자체로 오롯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어찌 되었든 이 세계 위에 발디디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세계의 조건, 혹은 세계는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가가 인류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방송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인류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은 선과 악 모두를 지니고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약육강식이라는 세계의 오래된 조건과 선과 악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의 차이 때문에 인간은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인류를 발전시켜 나갑니다(자세한 내용은 방송에서 확인해주세요 ㅠㅠ). 선과 악의 존립성은 세계의 조건이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이 오랜 세월 '약육강식'이라는 세계의 조건 속에서 살아오며 문명을 이룩해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폭력을 수단으로 인류를 발전시켜 올 수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굉장히 지저분하고 명확하지 않지만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설계의 입장에서 분석한 3가지 입장에 대해 이야기 해봤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입장을 생각해봐야 하는걸까요? 심심해서? 시간이 많아서? 아마 누군가의 마음속에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아니 최소한 불필요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인간이 공생하는 꿈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니면 이대로 가면 인간이 공멸할거라는 공포가 있어서는 아닐까요? 이유는 제각각 이겠지만 대부분 '이대로는 안된다'라는 생각을 했을겁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명확한 원인을 밝히는게 필요합니다. 원인도 모른체 무작정 덤벼든다면 실패할 확률이 크니까요. 만약 그 원인을 너구리 영감에게서 찾는다면 이건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태생이 그렇다는데 어쩌겠습니까. 두번째 입장에서 찾는다면 이건 그래도 덤벼볼만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실현가능성과는 별개로 지향점이 뚜렷합니다. 과거는 과거고 미래만 보고 나아가면 되는 것이니까요. 복잡한 것은 세번째 입장 입니다. 인간은 약육강식을 기본원리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수십만년을 살아왔습니다. 자연을 극복하고 문명을 이룩해 낸 오늘날에 와서는 약육강식의 원리를 거부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까지 쌓여온 약육강식의 결과들 입니다. 그래서 미토는 이 결과들을 없에고자 합니다. 설계자들, 암살자들을 모두 죽여서 말이죠.

"지구가 엉망인 건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야. 모두가 그럴듯한 사연과 변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인류가 수만년 동안 살아온 결과 이제는 누가 악이고 누가 선인지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 조차 힘듭니다. 모두가 그럴듯한 사연과 변명을 가지고 각자의 명분하에 폭력을 행사합니다. 도저히 하나씩 풀어나갈 수 있는 실타래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수레의 끈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이 모든것을 일거에 없애버리고 새로운 출발점에서 인류를 출발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폭력을 저지른 그 알렉산드로스 또한 제거되어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땅 위에서 자연을 극복한 문명을 가지고 미사같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 입니다. 이 부분에서 비약이 심하다고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정합니다. 다만 참고하시라고 만화의 일부분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원피스 63-64권에 다뤄지는 '피셔 타이거'와 '오토히메'의 일화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미토의 방법밖에 없을까요? 아닐겁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의 과거와 지금부터의 미래와는 상관없이 그저 개개인이 평화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택할지도 모릅니다. 자기길만 뚜벅뚜벅. 하지만 이것은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인류의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설명을 해야겠지만 이제 힘이 드내요.. 체력도 없고 저의 남루한 논리가 바닦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소설의 흐름과 저의 주관이 섞이다보니 중간중간 의아한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정도만 읽어주시고 넓은 아량으로 눈감아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다음에는 더욱 생각을 가다듬어 성의껏 작성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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