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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끝난 뒤

[쥐] 아이란의 뒷담화_아트 슈피겔만

by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016. 2. 23.

 


 

 

안녕하세요. 아이란입니다. 며칠 전 저희 방송에서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다뤘는데요. 아무래도 저희가 정해진 시간 내에 녹음을 해야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얘기를 맘껏 하지 못해요 ㅜ ㅜ 게다가 발언기회가 와도 마음만 급하고 정작 하고픈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글로 나머지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일단은 당시 이뤄졌던 첫번째 질문에 대한 이야기에요. '폴란드인은 왜 유대인을 박대했는가?' 당시 <송곳>이라는 드라마, 웹툰을 예로 들어 설명했는데-  방송분을 들어보니 제가 들어도 뭔 얘기지 싶더라구요ㅜ ㅜ 아무도 쫓고 있지 않은데 혼자 추노 찍듯이 맘만 급했어요 ㅜㅜ 아쉬움이 남아서.... 그래서 왜 이 작품 이야기를 꺼냈었는지 풀어보려고 합니다. 

 


 

 

 

1. 폴란드인들은 왜 유대인을 박대했을까?

폴란드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과 소련에 분할 점령된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들에게 독일은 침략국, 즉 적이다. 그러나 비유대인이었던 폴란드인들은 독일의 명령에 따라 같은 국적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에 동조한다. 민족주의, 제국주의가 팽배했던 전근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나치의 폴란드 유대인 탄압은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하다. (상대적으로 이해 가능 하다는 말이다. 곡해하지 마시길.) 그러나 폴란드인들이 어제의 이웃을 죽음으로 내몬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은 최규석 작가의 <송곳>이다. <송곳>은 대형마트에서 벌어진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웹툰으로,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송곳과 폴란드의 상황은 같은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일단 각 등장인물을 치환해 보자. 작품 속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푸르미 마트 정규직들은 폴란드 유대인을 박대하는 비유대인 폴란드인으로 고스란히 바꾸어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유대인을 신고하라’ 혹은 ‘동료를 해고하라’ 는 상부의 명령으로 “그래도 되는 상황”이 되자 그들은 기꺼이 어제의 이웃과 동료를 사지에 몰아넣는다. 

 

 

 _jtbc 드라마 <송곳>에 등장하는 푸르미 노조

 _1945년의 아우슈비츠 수용자들

 

본래 내재되어 있던 증오가 “그래도 되는 상황”을 만나 폭발한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는 알 수 없다. 학계에서도 이는 논쟁거리다. 그리고 그렇게 단순히 설명하기에 이는 너무도 복잡한 인간 본연의 성질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그저 내가 분명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그래도 되는 상황”이 오면 언제든지 비합리적 행위를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로 그들의 행동이 합리화 되지는 않는다. 같은 상황에서도 정도를 지킨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팔아버린 폴란드인의 행동을 ‘어쩔 수 없었다.’라고 옹호하고 싶다면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보호했던 폴란드인, 비정규직을 위해 싸운 이수인 같은 인물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우선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_최규석 작가 <송곳> 中

 

 

웹툰 <송곳> 중 이런 대사가 있다. ‘인간은 그래도 되는 상황에서 으레 그러기 마련이야.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그렇다. 인간은 그래도 되는 상황이면 보통은 그렇게 한다. 지금 잘난 듯이 글을 쓰는 나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본성이라는 이유로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리는 언제든지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견제해야 한다는 거다. (견제를 해 주는 진정한 친구가 있다면 더욱 좋다) '나 또한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항시 경계해야 그나마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_가자지구 폭격을 감상하는 이스라엘인들

 

 

이런 ‘자기 견제 태도’가 부족했던 폴란드인들은 결국 나치에 동조해 이웃이었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내 몰았다. 그 지옥에서 겨우 살아남은 블라덱 슈피겔만 또한 ‘검둥이는 믿을 수 없는 도둑놈’이라며 흑인 차별적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현 시대, 나치의 최대 피해자였던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을 향한 총탄세례를 영화보듯 감상한다. 피해자였던 그들이 가해자가 되어 나치와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현실인가. 과거를 잊은 유대인에게 손가락질 하는 우리는 다를까? 천만에 말씀 만만의 콩떡. 명심하자. 우리도 언제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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