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중년백수입니다.
금번 방송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하 노나없)에 대한 저의 한줄 평은 ‘시시포스의 바위’였습니다. ‘시시포스’는 실존주의 작가(본인은 부정하지만)로 잘 알려진 알베르 카뮈의 저작 ‘시지프의 신화’에서 반항의 아이콘으로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마침 방송 중에 실존주의와 관련된 언급이 나왔습니다. 세상에 이런 어마어마한 우연의 일치가..
내? 말도 안되는 개소리하지 말라구요?
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우연을 빌미로(뭔가 ‘신비한 티비 서프라이즈’스럽나요? 기분 탓일거에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대한 실존주의적 분석을 시도해볼까 합니다.
그럼 먼저 ‘실존주의’란 무엇인지부터 말해볼까요? 아쉽지만 중년백수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중년백수는 한낱 백수일 뿐입니다..(한숨)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모두 그저 중년백수가 어디서 주워들은 것들을 나름의 망상을 통해 뱉어내는 것이니 크게 신뢰하지는 말아주세요.
실존주의는 쇠렌 키르케고르부터 야스퍼스, 하이데거, 카뮈, 마르셀, 베르다예프, 사르트르 등등 다양한 철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주창되고 있습니다. 학자별로 현상에 대한 진단은 비슷하지만 그에 대한 처방은 서로 다릅니다. 공통된 문제의식 중 하나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탐구’ 즉,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 실존, 본질, 타자, 부조리 등과 같은 개념의 정의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각 개념들과 등장인물(모스, 쉬거, 벨)을 짝지어 두번에 걸쳐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존재, 실존, 본질 - 모스 혹은 개인, 또는 당신
거칠게 말하면 존재란 단어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고 실존은 그 존재의 실제적인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본질이란 그 덩어리들 끼리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그 덩어리만의 고유한 것입니다. 편의상 저를 모델삼아 개념을 간략하게 축소해 보겠습니다. 중년백수는 하나의 ‘존재’입니다. 중년백수의 ‘실존’은 187cm 근육질의 몸매에 조각 같은 외모를 소유한 인간의 형상을 띈 유기체 덩어리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제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지 않겠죠?
중년백수의 ‘본질’은 게으르고, 허무주의자에 입만 산 떠벌이.. 등등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전혀 감이 안오신다구요? 그럼 의자를 가지고 말해보겠습니다. 여기 하나의 의자가 있습니다.
의자가 ‘존재’하내요. 이 의자의 ‘실존’은 ‘평평한 나무판이 있고 그 밑을 네 개의 다리가 지탱하고 있다’입니다. 그리고 의자의 ‘본질’은 ‘인간이 앉기 위함’입니다. 의자의 실존은 모두 다를 수 있습니다. 다리가 세 개인 의자, 등받이가 있는 의자, 쇠로 만든 의자 등등.. 하지만 의자의 본질은 오직 하나 ‘앉기 위함’입니다. 그게 의자라는 존재인 것이지요.
설명이 잘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르트르는 이 실존과 본질이라는 개념을 통해 존재를 정의내립니다.
모든 존재는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 다만, 오직 인간만이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
모든 의자의 본질은 사람이 앉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개채로써 의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토끼의 본질은 풀을 뜯어 먹고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토끼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습니다. 어떤 토끼도 갑자기 고기를 뜯어먹고 체격을 늘려서 사자를 쥐어 패지 않습니다. 또한, 토끼는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하지도 않습니다. 그게 토끼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아무런 이유 없이 세상에 실존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정해진 본질 따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자살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제거하기도 합니다. 정해진 본질이 없기 때문에 다른 모든 존재와는 달리 오직 인간만이 자유를 가지고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유를 선고받고 이유 없이, 우연에 의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규정합니다.
이 자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매순간 ‘선택’을 하게끔 강요합니다. 인간은 정해진 본질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본질을 형성해 나가야 하고 무언가를 행동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자살을 의미합니다. 존재하지 않겠다는 뜻이니까요. 인간에게 있어 본질이란 바로 이 모든 선택의 결과에 다름 아닙니다. 내가 이런 선택을 했더라면 나는 이런 본질을 가졌을 것이며, 내가 저런 선택을 했더라면 나는 저런 본질을 가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가 탄생합니다.
인간은 자기 행위의 총합이다.
‘노나없’에서 시종일관 주장되는 한 가지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그것을 되돌리는 수는 없다’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모스는 사막 한가운데서 발견한 죽어가는 사람과 돈 가방 중 돈 가방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게 됩니다. 모스의 아내인 칼라진은 돈 가방은 만져보지도 못했지만 모스와 결혼했다는 선택 때문에 그 책임으로 인해 죽게 됩니다. 이러한 모스의 모습은 우리 개개인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는 매일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본질을 형성해 나갑니다. 즉, 모스는 선택하고 스스로 본질을 형성해나가는 인간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자유를 선고받고 태어나서 그 자유를 행사하는데 책임이 왜 발생하는 걸까요? 그건 나와 같이 자유를 선고받고 태어난 또 다른 존재. 즉,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이제 쉬거의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2부에서 계속됩니다.
덧. 예리한 독자라면 여기서 사르트르가 왜 인간이 자유를 ‘선고’ 받았다고 했는지 궁금하셨을 겁니다. 보통 ‘자유’라고 하면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인데 사르트르는 그것을 마치 형벌이나 되는 양 ‘선고’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그건 바로 자유의 속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부여받았을망정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자유는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그건 인간이 ‘세계’라는 한정된 공간에 내던져졌기 때문입니다. 마치 소설 속에서 동전의 앞, 뒷면을 선택할 자유를 강요받은 셀프주유소 사장이나 칼라진처럼 말이죠. 그들은 동전의 앞, 뒷면을 선택할 자유는 있었을망정 동전던지기 게임에 참여하지 않을 자유는 없었습니다. 갱단의 총격전에 휘말리면 어떻게 하겠느냐, 총을 집어 들고 너를 위협하는 그들을 향해 발포하겠느냐 아니면 숨어서 살아남기만을 바라겠느냐, 라는 모스의 질문에 ‘전 그런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답했지만 결국 모스와 함께 있다가 그런 상황에 처해 죽은 소녀처럼 말이죠.
이렇듯 인간은 자유를 강요당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매 순간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피곤한 일입니다. 토끼는 아침에 일어나서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본질에 따라 맛있어 보이는 풀을 찾아 뜯어먹고 똥을 싸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끼는 불안하지 않습니다(천적에게 쫓기는 불안과는 성질이 다릅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매 순간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며 이것은 ‘불안’을 유발합니다. 점심시간에 식당에 가서 메뉴를 고르는 일이 피곤했던 적은 없으신가요? 그냥 아무나 적당한 걸로 골라서 정해줬으면 하고 생각하신 적 없으신가요? 어떤 사람들은 자유가 유발하는 이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곤 합니다. 매순간 들이닥치는 ‘선택’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살핍니다. 그래서 ‘남들 사는 것처럼 살’게 됩니다. 하이데거는 이런 타락?한 삶을 ‘비본래적’ 삶이라고 명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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